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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운영자 202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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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웨인 마틴데일

휘튼대학교(Wheaton College)영문학과 교수이자 C. S. 루이스 연구가인 그는 학생들에게 C. S. 루이스를 더욱 쉽고 바르게 접근시키고자 C. S. 루이스와 관련한 정규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루이스를 보다 친숙하게 소개하고자 많은 강연과 집필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그는 루이스에 대한 많은 책을 기획, 편집하였으며 The Quotable Lewis의 공동저자로 작업에 참여하였다.

 

역자 이규원

한동대학교 전산전저공학부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하였다. 번역서로는 C. S. 루이스의 눈으로 나니아 읽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 있다.

 

Short Summary

잘못된 신화들의 영향으로 가려진 천국의 기쁨과 무뎌진 지옥에 대한 해부를 통해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과 갈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책이다. C. S. 루이스 연구자인 웨인 마틴데일은 C. S. 루이스의 저작에 대한 설명을 통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자유로운 사유와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해준다. 또한 우리 안에 잃어버렸지만 다시 시작되는 것들, 즉 영원한 왕국에 완전히 참여하는 믿음의 기품 있는 자아를 되찾게 해 준다.

 

천국 1. 천국의 신화 벗겨 내기: 논픽션

 

1. 천국에 대한 신화들

 

천국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신화들이 있다. 신화 1: “천국은 지루할 거야”, 신화 2: “뭐라고? 섹스가 없다고?”, 신화 3: “하지만 난 유령이 싫어!”, 신화 4: “나는 나를 잃고 싶지 않아”, 신화 5: “고작 왕관이나 쓰고 하프나 켜라고?”, 신화 6: “천국은 현실도피자의 생각이야”, 신화 7: “믿음이 깊어 봐야 세상에서는 도움이 안 돼

 

역설적이지만 천국에 대해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이러한 신화들은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너는 무엇을 하면 안 된다.’라는 것이 바로 천국의 논리라고 이해했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천국은 부정적인 장소일 뿐이었다. ‘전환이라는 중요한 설교에서 루이스는 이러한 오해를 깨뜨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한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 생각해 낼 수 있는 철학적으로 훌륭하고 성숙한 모든 생각들은 우리의 본성이 욕망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영원한 부정입니다. 음식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섹스도 없고, 운동도 없고, 웃음도 없고, 사건도 없고, 시간도 없고, 예술도 없다고 말입니다.” 루이스는 그러나 하나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영원히 그를 기뻐하는 것은 이러한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라고 했다.

 

천국이 지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천국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통해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일어나는 곳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모든 즐거움들을 창조하셨다는 루이스의 말을 기억해 보라. 그는 우리를 위한 곳을 예비하고 계시며,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헤리 블레마이어스도 천국에 관한 탁월한 글에서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최고의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했을지라도 그것은 천국을 미리 조금 맛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손과 눈과 말에서 사랑스러움을 발견하는 곳마다 당신은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아름다움과 모든 애정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지으신 창조물에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히 펼쳐진다는 것은 우리가 이전에 맛보고 꿈꾸던 모든 사랑스러움과 선한 것이 연합되고, 집중되고, 강렬하게 되는 것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랑 - 그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분의 인격적인 따뜻함 속으로 모이고 서서히 스며 나오는 모든 사랑 -은 그가 우리 앞에 보이신 것이다. 그것은 구속받은 자들이 받게 될 최후의 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독교인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경험들은 긍정이라는 것을 거의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감각은 세상의 집이야말로 오래되고 편안한 곳이라고 속삭이며 우리의 상상력을 세상에 강하게 묶어 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작 날아올라야 할 때에 만족스러운 세상 속에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혼란스러움에서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루이스의 책, 천국과 지옥의 이혼과 그 이후에 페렐랜드라를 통해서였다. 이 두 권의 책은 나의 생각을 천국으로 향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픽션이 때로는 냉정한 신학적 설명보다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에서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랜섬은 페렐랜드라 세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즐거움을 경험한 뒤 돌아와 친구들에게 이를 설명하려고 했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단어들은 너무나 애매했고 상상력도 충분히 구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은 너무나 생생해서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진정한 즐거움은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의 삶을 즐겁게 만들고, 자꾸 생각하고 싶어지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기뻐하게 만든다. 천국과 지옥은 부분적으로는 이것을 확대하여 생각해보면 된다. 참으로 완벽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의 경험은 퇴색하지 않는다. 시인 키이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한 기쁨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루이스는 침묵 행성의 바깥이라는 작품에서 맬러캔드라라는 타락하지 않은 행성에서 천국이 보내 준 즐거움을 상상해 보았다. 우주를 여행하는 지구인인 랜섬은 맬러캔드라에 처음 방문했을 때 이성적이지만 인간과는 상당히 다른 흐로스생명체 효이로부터 천국의 경험 속에 끊임없이 쌓여 있는 풍부함의 주된 요소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그것은 고상한 기억들이 계속 쌓이고 쌓인 기억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흐로스들은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근심 없이 매일 매일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완전함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다. 반대로 지옥에서는 지금의 삶에서 선택한 악한 기억들이 장차 구속받지 못한 것들과 더불어 두려움으로 쌓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기억한다면 세상에서의 선택들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지상에서의 삶 속에서 숨겨진 놀라운 의미를 볼 수 있다. 루이스는 완전하게 된다는 것에 함축되어 있는 흥분과 전율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존재는 근본적으로 완전함을 원하고 있다. 루이스는 완전함에 대한 심오한 의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희도 완전하라는 명령은 이상주의적인 과장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우리를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는 성경에서 우리를 이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가 이 일을 하도록 맡기기만 한다면 - 우리가 원한다면 못하시게 막을 수도 있습니다. - 아무리 연약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도 남신과 여신으로, 지금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과 기쁨과 지혜와 사랑으로 약동하는 눈부시게 빛나는 불멸의 존재로, 그분 자신의 끝없는 능력과 즐거움과 선함을 완벽하게 비추는 티 없이 맑은 거울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 과정은 길며 부분적으로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겠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 이하는 없습니다. 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천국 2부 천국의 신화를 다시 쓰기: 픽션

 

2. 천국과 지옥에 대한 신화들

 

어떻게 굳어진 이미지와 생각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세계를 떠나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루이스가 훌륭하게 창조한 상상문학에서 가능하다. 어떻게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까? 그 역시 상상문학을 통해서 가능하다. 훌륭한 픽션이라는 이 독특한 선물은 지성과 상상력과 감정에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픽션은 우리의 정신적인 전경이 완전히 바뀌는 경험을 하게 해 준다. 예수님도 항상 이야기를 통해서 가르치셨다. 이야기는 형식적인 적용을 일삼는 모든 추상적인 범주들에 도전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루이스가 판타지를 통해 천국을 탐색하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가 성경적인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했던 모든 시도들은 잘못된 것의 신화를 벗겨 내고 진실한 신화를 다시 쓰는 과정이었다.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특히 북유럽 신화와 같은 신화들을 좋아했다.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신에 대한 신화는 그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과 감정은 도덕적인 진실로 다가왔지만, 그는 이런 신화들이 고귀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루이스는 모들린 대학을 산책하면서 그의 친구 톨킨과 다이슨이 오래된 신화가 인간의 상상력에 주어진 신적 진실의 희미한 빛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라고 설명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생각이 바뀌었다. 데이비드 다우닝은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위대한 모든 신화들, 신이 인간을 위해 그 자신을 희생했다는 내용의 신화들은 구속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보다 높은 영역에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선천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것에 대해 논쟁했다. 그들에게는 성육신이 신화에서 역사가 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약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정말 전 세계의 신화 속에서 발견되는 중심적인 주제 속에도 포함되어 있다. ...루이스가 사랑했던 그리스신화와 북유럽 신화들은 단지 생각할 가치가 없는 현실도피적인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 신화들은 합리적으로 변화하는 진리에 대한 보물창고가 되었다. 신화는 부분적이며 왜곡되어 있지만 논리적인 탐구의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에 대해 통찰력을 가져다준다. 루이스는 다른 모든 신화들이 지적하듯이 진실한 신화인 기독교에서 선하고 현실적인 것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세계관을 발견했다. 그것은 역사에 기반하고 있는 믿음이자 그의 강력한 지성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믿음이었다. ...물론 그때부터 루이스에게 기독교는 모든 매혹적인 신화와 이야기들의 근원이자, 모든 신화들의 열쇠로 역사 속에서 역사 자체가 펼쳐지는 신화가 되었다.“

 

루이스는 신화와 진리 그리고 사실이라는 세 요소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모두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우주 3부작 침묵 행성의 바깥, 페렐랜드라, 저 무서운 힘중 두 번째 작품인 페렐랜드라에서 영웅 랜섬은 이제 비인간적인 웨스턴과 싸워야만 한다. 세계의 운명이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우리 세계를 위해 심오한 행위를 했던 것처럼 랜섬이 그와 같은 일을 하게 될 때, 화자의 목소리는 신화적인 부분을 감지하고 있다.

 

오래전 맬러캔드라(화성)에서, 그가 페렐랜드라에 오기 한참 전에, 랜섬은 신화와 진리와 사실의 세 영역이 순수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해 왔었다. - 그러한 구분은 일면적이며, 타락의 결과인 영혼과 육체 사이의 불행한 분리의 결과이다. 지구에서조차 성찬은 이러한 분리가 유익하지 않으며 최종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성육신은 이러한 분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알려 준다. 페렐랜드라에서는 그런 구분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무슨 일이든 지구인들은 그것을 신화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랜섬도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알고 있다. 무시무시한 어둠 속의 실재는 이렇게 귀중한 보석 같은 진리들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천국에 대한 신화를 다시 쓰면서 루이스는 인물과 상황을 놀랍게 배열하여 다섯 개의 주된 주제를 발전시켰다. (1) 예수님은 모든 것의 중심이다. (2) 천국은 전적으로 실제적이며,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은 천국의 그림자이다. (3) 천국은 하나님의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이것은 천국이 완전하며, 선과 정의와 자비의 창조와 사랑이 함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천국에서 인간성은 자신의 창조된 가능성이 실현되고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곳은 우리의 진정한 자연스러운 고향이다. (5) 모든 우리의 열망은 근본적으로 천국을 향한 것이다. (6) 우리는 예수님의 탁월함을 선택함으로써 천국을 선택한다. 이러한 주제는 성경적이며, 루이스의 픽션을 읽으면서 깊은 이해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열정의 위대한 근원을 되찾게 된다.

 

3. 창공을 천국으로 바꾸기: 침묵의 행성 바깥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편 8:3

 

루이스의 우주 3부작(혹은 랜섬 3부작)은 아마도 과학소설과 신학적인 논의가 결합된 최초의 작품일 것이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법대신 과학소설을 통해 그러한 메시지를 몰래 들여왔다. 클라이드 킬비는 이 3부작에서 신학적인 주제가 취하고 있는 목표를 적절하게 요약했다. “아마도 침묵 행성의 바깥페렐랜드라의 목표가 이때까지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저 무서운 힘은 무엇이 일어날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처음 두 작품이 죄에 의해 손상된 세상을 보여 준다면, 세 번째 작품은 죄의 지옥 같은 악몽이 미쳐 날뛰는 것을 보여준다. 앞의 두 작품이 죄 없고 조화로운 장소인 천국이 어떤 모습일지 미리 예시한다면, 세 번째 작품은 죄의 파괴로 영원히 훼손된 장소인 지옥이 어떤 모습일지 보여 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3부작 중 침묵 행성의 바깥은 천국과 지옥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다음의 주제들과 관련된 상상력 풍부한 관점들을 제시하며, 나머지 두 책에서도 동일한 주제들이 다시 타나난다:

 

* 타락하지 않은 창조와의 조화(창조물과 그의 환경 사이)

* 동물과 인간, 천사, 그리고 신과 다른 창조물 사이의 조화

* 죄로 인한 사망

* 새롭고 더 나은 것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기 원하시는 필수적인 것으로써의 죽음

* 하나님의 더 크신 계획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잠정적인 인간성과 현재의 창조물(우주)

* 개인과 세세한 것까지 고려하시는 하나님(오야르사는 웨스턴 같은 엄청난 죄인에게조차, 즉 그의 구부러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보고 자비를 베푼다.)

*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한 겸손(예를 들면, 육체적인 한계로 인해 우리가 볼 수 없는 것, 루이스는 상상하기 어려운 천국의 차원들을 암시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관점을 제시했다.)

* 빈 공간이 아니라 영광으로 충만한 천국

 

천국으로서의 우주

우리가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세계는 어디에나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티끌 같은 모래 속에서조차 우주를 볼 것이며, 위를 본다면 시편 기자의 말처럼 창공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루이스는 우주의 광대한 공간을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통의 문제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무신론자였던 시절에 우주가 빈 공간이라는 것은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에게 우주는 생명이 없는 커다란 텅 빈 쓰레기장으로 보였고, 유일하게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조차도 수백만 년 전에는 생명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먼 미래에 태양연료가 모두 떨어지고 나면 지구상의 생명체가 사라져 다시 그런 상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창조에 대한 흐릿한 시선은 루이스가 회심한 것처럼 예수님의 빛에 의해 명확해져 갔다. 회심을 통해 루이스는 우주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우주는 텅 빈 공간에서 비옥한 생명의 원천이자 생생한 생명으로 바뀌었다. 조지 무사치오의 말처럼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해 우주에는 다양한 종류의 있음직한 생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창조물들을 통해 완전함과 충만함, 생명과 에너지, 선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곳에 있는 우주를 전혀 낭비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우주의 빛나고 무수한 소산들은 밤마다 수많은 눈으로 지구를 내려다본다. 예전의 사상가들이 우주를 창궁 - 영광을 선포하는 창궁 -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랜섬은 이 창공을 떠나 중력이 작용하는 맬러캔드라(화성)를 향해 가면서, 새로이 발견한 영광들을 뒤에 남겨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높이와 추락하는 느낌 - 창공 속에서는 전혀 없던 -이 계속 반복되었다. ...갑자기 우주의 빛들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어떤 악마가 더러운 스폰지로 창공의 얼굴을 문지르는 것처럼 빛나던 광채가 창백하고 비루한 회색으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반대로 그가 이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맬러캔드라의 대기에서 거의 벗어나 창공에 가까운 멜딜론을 여행할 때에는 그는 예전의 부풀었던 마음과, 솟아오르는 장엄함, 아무런 요구 없이도 무한하게 주어지는 삶과 힘에 대한 느낌을 한번은 침착하게 또 한번은 황홀하게 느꼈다. 창공에서는 천국처럼, 가장 평범한 경험조차도 숭고하게 되고 모든 감각들은 더욱 예민하게 되었다.

침묵 행성의 바깥에서 창공heaven'천국heaven'이라는 단어는 천국과 연결되는 두 개의 중요한 고리이면서, 동음이의어라는 관련성이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이와 같이 사용되는 동음이의어가 또 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바꿔서 사용되는 단어인 맬럴딜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창공에 사람들을 거주하게 하고 맬럴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영들이나 천사로 사용되는 단어인 엘딜이 있다. 엘딜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천사들의 일을 수행하며, 공포에 떨게 만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현명함에 있어서는 존경받을 만하다. 웨스턴 박사처럼 단지 어리석거나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만이 감히 그들과 언쟁하거나 헛되이 그들을 속이려고 한다. 엘딜들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실체가 없는 육체를 지니고 있다.

 

이 강력한 존재는 종종 세계를 지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인간조차도 그러한 통치자를 오야르사라고 부른다. 페렐랜드라의 오야르사인 엘딜은 아주 겸손하게 맬럴딜이 보낸 인간과 닮은 창조물들이 다스릴 행성을 예비하며, 그들이 어떻게 행성을 다스려야 하는지 배우는 것을 기꺼이 돕는다. 엘딜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확실히 천사들의 돌봄을 받는다. 그리고 성경은 나중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 맬러캔드라(화성)의 창조물은 선하지만 처음에는 랜섬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것은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자연스러운 공포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괴물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랜섬은 그들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무서운 소문을 우연히 들었을 때,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다. 그러나 결국 맬러캔드라의 세 가지 이성적인 종들 - , 흐로스, 피필트리기 -은 모두 타락하지 않은 종들이며, 솜씨가 좋고, 지성적이고, 친절하며 친구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랜섬은 낙원은 한 번도 상실된 적이 없으며 예전의 꿈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엘딜들과 맬럴딜의 영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그리고 환경과도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세상에 천국은 없다

루이스의 책들은 세상에서 천국을 창조하려고 하는 시도가 무용한 고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과학자들과 진지한 작가들이 우주에 대한 희망과 우주의 의미를 인간의 우주식민화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루이스는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인 과학자 웨스턴 박사가 가진 관점의 위험을 폭로한다. “웨스턴주의는 정말 위험하다. 내가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내 학생들이 행성 간 식민화를 진지하게 꿈꾸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우주 전체의 의미를 인류의 영속화와 진보에 두며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과학적인 희망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정한 라이벌이다.” 그러나 웨스턴이 확실히 선을 인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비뚤어졌지만 그의 조수인 데바인처럼 지구의 오야르사(사탄)의 조종 아래로 완전히 구부러지지는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인류라는 자신의 종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선한 자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웨스턴과 데바인이 살아가는 우주는 어떻게 보일까? 그것은 기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우주의 도살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루이스 이전에 씌어졌던 과학소설에서 우주는 극복하거나 통과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지구인들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우주 생명체는 기괴하고 악하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의 과학소설에서 신중하게 이런 생각에 맞섰다. 다른 행성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선한 오야르사들이 통치한다. 오직 침묵의 행성인 지구만이 신에게 반기를 든 구부러진 오야르사(사탄)’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지구는 오야르사들의 지배권 영역에서 끊어지게 된다.

 

맬러캔드라의 오야르사는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행하셨으며 궁극적으로 지구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배우고 싶어 했다. 이러한 오야르사의 희망은 베드로전서 1:12에 암시된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랜섬은 성육신, 생명, 죽음,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오야르사가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오야르사는 맬러캔드라의 선한 생명체들을 죽이고, 우주식민화를 꾀하는 지구의 웨스턴에게 악이 들어갔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루이스는 죄 있는 자들이 뻔뻔한 기술적 용어를 사용하고, 진보가 아니라 죄를 선전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천국으로 가는 관문으로서의 죽음

우리는 적어도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맬러캔드라 생명체의 관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도 죽는다. 그러나 이 타락하지 않은 생명체들은 죽음을 환영한다. 죽음이 죄 때문이 아니라 맬럴딜이 모든 창조물을 새롭게 만드시며 우주 자체도 그런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똑같은 일을 두 번 하지 않으신다. 그는 항상 선을 다양하게 구별되게 하신다. 그가 새로 창조하실 때에는 이전의 모델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것을 통합하고 포함하여 전혀 새로운 종류의 존재를 만든다. 그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사람들은 종종 다음 단계의 진화 - 인간보다 더 나은 단계의 진화 -가 일어날 것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 단계의 진화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설명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 책의 마지막에 가서 다시 반복된다. 한 흐로스가 세 명의 죽은 흐로스들의 육신 앞에서 애도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죽은 흐로스들의 육신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오야르사에게 보낸다. “그가 죽게 하라. 그리고 분해되어 더 이상 육신이 남지 않게 하라. 그가 내려가도록 하라. 나우(이성, 영혼)가 그로부터 올라올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삶이자 다른 시작이다. 열려라, 오 무게도 없고 육신도 없는 다채로운 세계. 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어서 더 훌륭해질 것이다. 이번이 첫 번째라 너는 연약했었다.” 오야르사가 응답한다. “그들의 육신이었던 움직임들을 흩뿌려라. 그러면 맬럴딜께서 연약한 첫 번째 육신이 닳아 낡아졌을 때 온 세계에 뿌리실 것이라.”

 

오야르사는 지구의 인간들은 자신의 종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명하지만 그것을 견뎌낼 만큼 현명하지는 않다.”고 평가했다. 반대로 나의 사람들은 가장 약한 자들조차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네. 당신들의 삶을 망치고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닥쳐오는 것으로부터 달아나라고 중상하는 자는 바로 당신 세계의 주인인, 구부러진 자라네. 만약 당신이 맬럴딜을 섬긴다면 평안을 얻게 될 것이네.”

 

4. 되찾은 낙원: 페렐랜드라

아담에게 이르시되...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창세기 3:17

다시 저주가 없으며...”- 요한계시록 22:3

 

침묵의 행성 바깥이 특히 우주 공간과 우주의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신화를 다시 쓰는 작업이었다면, 페렐랜드라는 지구에 대한 신화를 다시 쓰는 작업을 통해 생명과 선이 풍부하고 타락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지구에서 페렐랜드라로 여행을 하게 되는 랜섬(ransom)은 그 이름의 의미(그리스도의 속죄)처럼 이 행성을 지구와 같은 타락으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랜섬은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인간에게 친숙한 광경들을 즐겼다. 그의 두려움은 완벽한 사랑과 경외감으로 바뀐다. 페렐랜드라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하신다. 완벽한 환경, 어떤 방해도 없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창조물들,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자유와 충만함.

 

랜섬은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길 때 그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충만함과 흥분과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자신의 시간, 자신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죄로 가득 찬 습관은 버려야 한다. 루이스는 기독교와 문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에는 중립적인 구역이 없습니다. 모든 1인치, 1초도 하나님은 주장하시고 사탄이 이에 대항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분쟁 없이 통치되는 곳이다. 우리의 진정 자연스러운 상태, 우리가 창조된 상태는 하나님 안에서 쉽게 기뻐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웨스턴은 파우스트 박사처럼 초자연적인 힘을 위해 그의 영혼을 교환하여 자신을 버렸다. 그의 육체와 인격은 악마에게 사로잡혔다. 그는 잠도 필요 없게 되었고, 진리를 왜곡하고 지구 역사의 사건들을 잘못 해석하는 사악한 재능을 갖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그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히 랜섬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떨쳐낼 수 없는 것이었다. 랜섬이 오랜 갈등 끝에,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반인간(악마에게 사로잡힌 웨스턴 박사의 육신)과 싸우기로 결정했을 때, “확실히 어떤 의지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내일 이맘때 네가 불가능한 일을 했을 것이라는 완벽한 확신이 다이얼을 읽는 것처럼 객관적이고 감정에 치우침 없이 그의 앞에 생겨났다. 그 순간 랜섬은 자신의 삶에서 예정자유의지는 명백히 동일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구별되고 모순 되는 것들이 예수님의 현존 속에서는 모두 큰 평화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천국은 모든 역설을 해결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우리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는 것이 아니다. 진리 그 자체의 존재 앞에서는 그런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괴롭히는 질문들이 사라지는 것, 영혼과 정신과 육체의 회복된 조화, 모든 창조와 창조물들 간의 조화, 신과의 조화 - 루이스는 이 모든 것을 페렐랜드라에서 그려내 보인다. 이 책은 에덴이 회복되고 저주가 사라지는 모습을 묘사한다. 창세기에서는 저주가 시작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저주가 다시 사라진다. 천국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게 된다. 페렐랜드라의 남녀 한 쌍인 토르와 티니드릴은 행성을 통치한다. 천국에는 새로운 종류의 일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다. “이 날은 세계가 태어난날이며 토르와 티니드릴은 당신들의 조상(아담과 이브)이 실패했던 곳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되고자 했던 존재의 왕좌에 앉을 것이다.”

 

5. 인간의 가능성의 실현: 천국과 지옥의 이혼

그리스도가 들어가는 곳은 어디나 천국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삶에서조차도.” - C. S. 루이스

 

이 책에서 루이스의 진정한 관심사는 천국이 어떠한 물질적인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희망이 실현되는 곳이며, 지옥은 그에 비해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곳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또한 그는 영혼이 지옥이나 천국을 향해 돌이킴으로써 - 악마의 도움 또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선택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책의 화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천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렇다면 루이스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실제로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을까? 절대 아니다. 그가 이 책의 제목을 천국과 지옥의 이혼으로 선택한 것은 윌리엄 블레이크가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말했던 생각과 풍자를 반박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블레이크는 지나침의 길을 걷다 보면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라고 주장했고, 진보하려면 반드시 정반대의 것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현실은 아니면 의 문제이다. 지옥을 붙들고 있는 한(세상을 붙들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천국은 볼 수 없다. 천국을 받아들이려면 지옥이 남긴 아주 작고 소중한 기념품까지 미련 없이 내버려야 한다.”

 

책 속의 화자가 그의 스승에게 모든 사람들이 버스를 탈 기회가 있는지 물어봤을 때, 스승 맥도널드는 말한다. “버스를 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 타게 되어 있으니 걱정 말게.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 하나님에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 주마.’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게 된 걸세.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게 없다면 지옥도 없을 게야. 진지하고도 끈질기게 갈망하는 영혼은 반드시 기쁨을 얻게 되어 있네.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렇게 시작되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은 시간과 영원과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한 어질어질한 생각으로 끝난다. 루이스는 시간 속에 있으면서 오래된 역설을 풀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솜씨 좋게 보여준다. 시간 밖에 계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원한 현재로 보신다. 우리에게는 아직 미래의 것이라고 해도 그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간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이 선택이 앞에 주어져 있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을 스무 번째 읽으면서 천국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과 죄인을 위한 피 흘림의 사랑이 없었다면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지막 페이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 책의 끝 부분의 시간적 배경은 지옥의 어스름한 회색의 영원한 저녁과 천국의 안쪽에서 해가 뜨기 전의 영원한 새벽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아직도 순례자이며 천국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직도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안내할 수 있는 시간은 남아 있다.

 

6. 놀라움과 기쁨의 땅: 나니아 연대기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 시편 37:4

 

나니아는 이 세계와 거의 유사한 곳이다. 나니아에서 예수님과 대칭되는 아슬란의 특징은 우리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활동들을 상기시킨다. 돌탁자에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이루었고, 법이 죄인에게 내린 죽음의 형벌을 에드먼드(우리) 대신 죽음으로써 무효화시켰고, 캐스피언 왕자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아슬란의 대리인 박쿠스를 통해서 재연했다. 그리고 약속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 하지만 여전히 믿고 기도하는 남은 자들의 모습에서는 자신의 메시아를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오랜 탄압의 역사가 메아리친다. 또한 나니아에는 왕권의 찬탈, 정당한 후계자, 전쟁, 용기, 성장과 같은 세속적인 문제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나니아의 창조물들은 천국과 천국이 보내신 이의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영원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다. 믿음과 불신에 대한 질문들은 이렇게 중대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캐스피언 왕자에서 믿음의 문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제기된다. 맨 먼저 아슬란이 수백 년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뒤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지만, 오소리 트러플헌터는 옛 나니아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를 믿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기 이익만을 생각한다고 알려진 난쟁이들에게 과거나 미래는 소용없는 것이었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는 아이들 중에서 가장 어린 루시가 아슬란을 만났다고 했을 때, 믿음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들은 루시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매우 느릿느릿하게 인정했고, 에드먼드는 의심 때문에 아슬란을 받아들이는 데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에드먼드의 의심은 냉소와 불신으로 변했다. 우리들 모두처럼 에드먼드는 아슬란에게 구원받지 못했다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캐스피언 왕자에서도 아슬란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루시였다. 아이들은 미라즈 군대(왕좌를 찬탈한 캐스피언의 삼촌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는 캐스피언 왕자를 만나기 위해 아슬란이 알려 준 길을 따라 떠날 채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슬란이 알려 준 길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루시는 그때 그들이 결정한 반대 방향에서 아슬란의 얼굴을 보았고, 그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모두들 루시가 본 것을 무시하고 피터의 잘못된 본능을 따라갔다. 많이 지체되고, 헛되이 노력하고, 피곤에 지치고 나서야 루시가 아슬란을 보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나니아 연대기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주제이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도 가장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슬란을 찾고 그의 계획에 의지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 삶에서 그렇듯이 나니아에서도 항상 깨어졌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 역사의 핵심 축이며, 성경과 기독교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나니아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아슬란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루이스는 문학 속에서 가장 원대한 결론을 펼치면서 천국의 비전을 올바르게 가지게 만든다. “드디어 고향에 왔습니다! 이곳이 진정한 내 땅입니다. 우리가 찾던 땅입니다. 우리는 옛 나니아가 가끔씩 이곳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그곳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세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에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나니아에서도 그러하다. 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태양과 달이 빛을 잃고, 새 나니아의 피터(베드로)는 아슬란의 명령에 따라 옛 세계에서 천국으로 들어오는 문을 영원히 받아버린다. 그러자 땅이 흔들리면서 향긋한 공기가 갑자기 한결 더 향긋해졌다. 그들 모두 등 뒤에서 반짝이는 빛을 의식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티리언 왕은 두려움에 떨며 맨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티리언 왕이 그토록 열망해 오던 황금 빛 사자, 아슬란이 서 있었다. 티리언은 사자에게 다가가 사자의 발치에 몸을 던졌다. 사자는 티리언 왕에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장하도다, 암울한 시기를 꿋꿋하게 버틴 나니아의 마지막 왕이여.”

 

그들은 모두들 새로운 세계에 대해 빨리 깨닫게 된다. 천국은 아슬란의 나라처럼 모든 것이 허용된 곳이다. 죄가 추방되고 우리는 틀림없이 모든 사물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금지된 욕구나 충동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야말로 진정 그 날의 명령이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드렸던 기도는 천국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루이스는 한 편지에서 천사와 축복받은 인간의 영들이 그저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이 지휘자에게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처럼 주저함 없이 기쁨으로 하나님의 의지대로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새로운 육체는 새 나니아에 놀랍게도 잘 어울린다. 루이스는 그 높이와 범위와 아름다움에서 숨막힐 만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일행들은 더 높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라고 외치면서 계속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거대한 폭포에 마주치자 엄청난 속도로 폭포를 거슬러 헤엄쳐 올라갔고, 구름보다 높이 있는 산들을 날아가는 듯이 뛰어넘어, 결국 진정한 나니아,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의 근원인 천국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 모든 놀라움들은 아슬란이 힘차고 아름답게 살아있는 폭포수처럼 절벽에서 절벽으로 뛰어내려 오고 있는모습 앞에서 더 이상 놀라움이 아니다. 루이스는 아슬란에 대해 마지막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슬란은 더 이상 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슬란의 원형인 예수님에게 서서히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의 존재는 우리의 가장 깊은 기쁨이 되며, 천국의 정의 그 자체가 될 것이다.

 

7. 보고도 믿지 않을 때: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 요한복음 6: 35-36

 

C. S.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거대하고, 탐험되지 않은 굉장한 곳을 욕망하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그는 책이나 음악, 아름다움, 좋은 경험들을 통해서 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추구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속임수라는 것이 밝혀진다. 세상적인 행복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고 만족감을 줄 것이나, 우리는 항상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기쁨과 다른 모든 갈망들은 근본적으로 천국을 향한 것이며, 순례자를 집으로 인도하기 위해 길에 놓여 있는 표지판과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 루이스는 이후로 기쁨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헛된 노력을 그쳤다. 그러나 기쁨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소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서 그는 큐피트와 프시케의 신화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면서 천국을 향한 갈망, 천국을 얻는 데 필수적인 믿음, 그리고 사랑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룬다.

 

이 소설은 재앙이 닥친 도시를 위해 프쉬케를 희생양으로 취한 신들을 고발하는 오루알을 주인공으로 하여,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프쉬케와 이를 의심하는 언니 오루알에게 초점을 맞춘다. 프쉬케는 마치 메시아처럼 재앙이 임한 도시 이곳저곳을 두루 다닌다.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치료되었고, 군중들은 그녀의 앞에 절하고 발에 입맞추고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사람들은 죽고, 문제는 계속되고, 사제는 죽을병에 걸렸으며, 그러자 군중들은 곧 프쉬케를 비난하며 등을 돌렸다. 사제는 프시케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프쉬케는 기꺼이 희생양이 되고자 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신들의 회색 산을 보면서 멀리 있는 그 산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었다. 처음 보자마자 그 산과 사랑에 빠졌다. 이러한 프쉬케의 갈망은 신성한 것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곧 신의 산에 가서 신과 결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해 그다지 낙천적이지는 않았다. “죽어야 한다면 죽는 거지요, 오루알. 죽지 않으면 어떻게 속죄양이 될 수 있겠어요? 내가 신에게 가는 거라면 당연히 죽음을 통과해야겠지요. 어쩌면 그 이상하기 짝이 없는 거룩한 말씀들이라는 것이 다 사실일지도 몰라요. 신에게 삼켜버림을 당하는 것과 신과 결혼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요.” 프쉬케는 죽음이란 작고 어두운 방의 문을 열고 진정한 햇살이 비치는 넓은 곳으로 나가는 것임을 믿었고, 마침내 자신이 갈망하던 그것을 얻게 된다.

 

오루알은 프쉬케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남긴 흔적을 찾으러 간다. 드디어 프쉬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신랑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아름다운 궁전과 향기로운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프쉬케는 오루알을 그녀의 집으로 초대했지만 그녀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불신 때문에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실재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오루알은 천국의 실마리를 잡아보려고 애썼지만, 바로 앞에 주어진 증거조차도 선입견에 맞추어 해석해 버렸다. 프쉬케가 가장 위대한 왕중왕을 보고 있을 때, 그녀는 오직 죽음의 상징인 그림자 야수를 보고 있었다. 오루알은 프쉬케의 희생을 죽음과 삼켜버림과 신성모독으로 보았다,

 

오루알은 천국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열 때까지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절망하고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왜 나는 볼 수 없는데 프쉬케는 볼 수 있는가? 내가 그 아이를 엄마처럼 품에 안고 키웠는데, 프쉬케는 이제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실재를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프쉬케를 미쳤거나 잔인하다고 판단하여, 그녀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한다. 프쉬케를 자신의 통제 아래 붙들어 놓고 싶어 하는 그녀의 뒤틀리고 이기적인 사랑은 지옥에 매달려 있었다. 오루알은 환각에 짓눌렸는데 그 환각들 속에서 프쉬케는 그야말로 원수였다. 참을 수 없이 억울한 감정이 전부 프쉬케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망상에 시달리게 되자 오루알은 신들을 탓하기 시작했다. 프쉬케는 먼저 신을 사랑하면 자신을 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고 했으나 오루알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오루알을 위한 해결책은 근본적이고 심오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역시 그렇다. 그녀가 신들의 법정에 있는 동안 자신을 책망하는 일을 그만두었을 때, 그녀의 눈이 열렸고 그녀는 자신의 자아가 자기중심적인 상태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후회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신화를 벗어나기 위한 오루알의 엄청난 몸부림, 그리고 오루알을 구하기 위한 프쉬케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오루알에게 해방의 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은혜다. 신은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되찾기 바라신다. 그러나 그건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그 과정이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죽기 전에 죽을 수 있는유일한 장소인 세상에서 시작되며, 참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우리의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결말에 이르러 오루알이 프쉬케에게 한 이야기는 그녀가 치유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 프쉬케, 여신이여, 다시는 당신을 내 것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제게 있는 것이 다 당신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을 요구하던 모습에서 사랑을 주는 모습으로 나아간다. 루이스는 이것이 천국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받는다. 이제 오루알은 고백한다. “프쉬케가 귀하다면 그것은 그분 때문이리. 가장 두렵고 가장 아름다운 분... 유일한 두려움이요 아름다움이신 그분이 내게 오고 있네!” 마침내 오루알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을 상으로 받는다.

 

선은 오직 하나, 하나님뿐이라네. 그 밖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선하고, 등을 돌리고 있을 때는 악한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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