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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병원이다 운영자 202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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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영기

 

최영기 목사는 텍사스 주의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다. 신약 성경의 교회를 만드는 꿈을 갖고 시작한 가정 교회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서울 출생으로 경기고와 서울대학교 전자과를 졸업했고, 1970년에 도미하여 오하이오 주립대 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76년 박사학위 취득 후 북 캘리포니아의 팔로알토에 위치한 배리안(Varian) 사의 중앙 연구실에서 근무하면서 새너제이에서 집사, 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산호제 제일 침례교회에서 장년 주일 학교 7개 반을 처음 조직하여 32개 반까지로 성장시켰다. 평신도 사역자를 키우라는 부르심을 받아 41세에 골든 게이트 침례신학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부터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조혜순 사모와의 슬하에 1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저서로는 구역 조직을 가정교회로 바꾸라(나침반)가 있다.

 

Short Summary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성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실망합니까? 교회에서 천국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거만하고, 이기적이고, 혈기 부리고, , 담배, 노름에 중독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변화 받는 치료의 장소가 바로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병원이기 때문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치료하고, 치료받는 병원 분위기로 바뀌겠습니까? 치료의 역사는 언제든지 조그만 그룹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 교회는 작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8명 정도의 가정교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정교회는 구역 조직이 아닙니다. 정말 교회입니다. 그곳에는 가르침도 있고, 훈련도 있고, 선교도 하고, 무엇보다 실제로 치료가 일어나는 조그만 교회입니다. 그리고 가정교회가 제 기능을 잘할 때에 참된 사랑도 가능합니다.

 

 

 

1. 가정교회란?

 

교회는 병원이다

 

이상적인 교회에서 교회 생활을 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교회를 찾자면 먼저 이상적인 교회가 어떤 것인지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에베소 교회가 우리가 찾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가 될 수 있는 조건 -좋은 위치, 문화적경제적 중심지, 훌륭한 창립자와 훈련받은 지도자- 을 다 갖춘 곳 같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회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인 중에 거짓말쟁이들과 혈기 부리는 사람, 도둑질하는 사람, 쌍소리나 음담을 지껄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성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실망합니까? 교회에서 천국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거만하고, 이기적이고, 혈기 부리고, 술 담배, 노름에 중독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변화 받는 치료의 장소가 바로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개념부터 바꿔야 합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교회는 병원이기 때문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치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치료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병원에서는 아픈 사람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인격이 모자란다고 나무라면 안 됩니다.

 

치료받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의 분위기가 가족적이어야 합니다. 가정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허물이 용납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가족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또한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분위기가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지 말아라하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는 즉시 하라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무슨 결심을 하든지 간에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해지고 싶으신 분들은, 자신을 낮추려 마시고 남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도 잔소리하지 말기를 결심하지 말고 칭찬을 많이 하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치료는 부정적인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치료하고, 치료받는 병원 분위기로 바뀌겠습니까? 치료의 역사는 언제든지 조그만 그룹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교회는 작아야 합니다. 앞으로 가족을 생각할 때는 부인 혹은 남편, 자녀들을 비롯해서 가정교회에 속한 8명 내지 15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 앞에서는 나의 치부를 내어 보일 수 있어야 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족과 같은 조그만 교회들이 합쳐져서 서울침례교회를 이루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이 목적을 갖고 이곳 후스턴 서울침례교회에 왔습니다. 가정교회가 제 기능을 잘 할 때에 참된 사랑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막막한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가정교회를 통해 이들을 가족과 같이 사랑하면 사랑에 대한 개념이 아주 확실해집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도 너무 추상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곳이 가정교회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교회 구조가 가정교회입니다. 가정교회는 새로운 교회 형태가 아니라 예수님이 생각하신 교회 형태입니다. 제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생활 태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작은 그룹 가운데서만 가능합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설교나 성경 공부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결심도 하게 하지만 구체적인 제자화에는 그다지 큰 효과가 없습니다. 제자는 몇 사람이 모여 생활을 나눌 때에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두 명을 뽑아서 3년 동안 생활을 같이하셨고,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를 만드신 방법이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깨닫고 그 목적을 향해서 일해 나갑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 삐뚤어진 성격이 바로 잡아지고,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치료되고, 잘못된 생활 방식이 고쳐지는 은혜가 체험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지 일어나지 않는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남에게 쏟아놓거나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조금 시원해지나 치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닮아갈 때에 비로소 그 상처는 자동적으로 치유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볼 때, 그분의 인격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된 것이 용서입니다. 억울하게 잡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갈 때에 자신의 속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용서의 능력을 극적으로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한 자매님이 갑자기 다리가 저려서 걷질 못하는 증세를 보였습니다. 교회를 못 나오다가 삼 주일만에 절룩거리며 나왔습니다. 성령님께서 저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면 즉시 응답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불러다가 기도를 시작하면서 다리가 아프게 된 원인을 물었습니다. 다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그 자매님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털어놓았습니다. 남편이 자신에게 직장을 가지라고 보채더라는 것입니다. 자매님의 전문 분야를 살릴 수 있는 일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자매님은 그런 남편이 미웠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그 자매님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을 용서하고 원망했던 것을 하나님께 회개할 용의가 있습니까? 그래야 낫습니다.” 그 자매는 잠시 생각하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을 미워했던 것을 회개하고 남편을 용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후 제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자매님으로부터 받은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 깨끗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도록 해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교회를 병원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교회 사역은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역이 분담되어야 합니다. 사역자, 즉 목사의 할 일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평신도의 은사가 무엇인지 발견하여 개발해 주고, 은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고, 가진 은사를 통하여 사역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평신도의 할 일은 봉사의 일을 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봉사라는 단어는 집사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섬기는 일을 통해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목사가 해야 할 일과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에서 대부분 사역 분담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목회자 자신들이 이 사역 분담에 관해 혼동하고 있는 수가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안하고,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은 빼앗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훈련시켜서 사역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하는 것이 목사의 일인데 이것을 안 합니다.

 

성경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인 한 분 한 분이 다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몸’, ‘각 마디’, ‘각 지체라는 단어에서 바울은 성도는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모두 다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주님의 몸이고, 성도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하면, 성도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주님의 사역을 해야 합니다. 연락하고 상합하여 유기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각 지체의 분량대로, 받은 은혜만큼, 주신 믿음만큼,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 전통적인 교회 구조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나눠야 합니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교회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열 명 정도라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돌보는 마음을 가지신 분은 돌보는 사역을, 가르침의 은사를 가지신 분은 가르치는 사역을, 권면의 은사를 가지신 분은 권면의 사역을,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분은 남을 돕는 사역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사역을 가능케 합니다. 모두 다 그리스도의 지체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가정교회가 최선의 교회 구조입니다.

 

공동체로 부르신 뜻

 

히브리 사람들에게 선과 악은 추상적이 아니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히브리어의 모든 단어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선이란 실생활에 유익한 것이고, 악은 실생활에 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다는 의미는 이제부터는 무엇이 나에게 유익한지, 무엇이 나에게 해가 되는지를 내 스스로가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범죄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 신뢰, 믿음의 관계였습니다. 마귀는 이 신뢰에 의심의 쐐기를 박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이제부터는 무엇이 나에게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를 내가 결정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이 인간 사회에 고독이 시작된 순간입니다.

 

범죄의 결과는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가 수치심입니다. 그들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어겼을 때는 수치심이 생깁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지었다면 입을 가려야 하는데 생식기를 가렸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들의 수치는 자신의 존재, 자신의 삶의 핵심을 건드리는 수치라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수치가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는,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동산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랑의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점을 지적해 주십니다.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해서 보여주셨을 때는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기뻐했던 아담이 이제는 아내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당신이 만들어 준 이 여자 탓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부부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수치심은 언제나 두려움과 연결되며 관계의 단절로 발전합니다. 진짜 내 모습이 발각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주위에 성을 쌓습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꽉꽉 닫습니다. 그 결과는 외로움입니다. 고독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독이 수치와 두려움의 결과라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살면서 한 번도 수치를 느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3년을 모시고 이분을 봤지만 죄를 짓는 것이나 거짓말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삶을 사신 유일하신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수치 그 자체였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교수형이 아닙니다. 노예들만이 당하는 수치스러운 처형 방법입니다. 수치를 느낄 필요가 없는 분이 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습니까? 우리의 수치를 제거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완전한 삶을 사신 분이 왜 처형을 당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돌아가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해 믿기만 하면 죄를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옛날에는 수치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었던 사람도 이제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치심과 두려움의 제거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무섭고 두려워 할 심판자가 아니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용납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아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관계 회복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에도 확대되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회복은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은 공동체 말입니다.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이 계신데 세 분이 합쳐져서 한 분 하나님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독불장군이 아니라 공동체로 계십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겟세마네로 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서 하신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기도였으므로 굉장히 중요한 기도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21절에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분이시다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믿는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볼 때 비로소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드린 기도의 목적은 제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가정교회 목원들은 진정한 사랑을 나눔으로 가정교회를 따뜻한 장소로 만드셨습니다. 마음놓고 웃을 수 있고,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그친다면 가정교회는 실패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겹겹이 쌓인 벽을 제거해야 합니다. 안전하게 다치지 않을 얘기만 골라 하는 한 참된 사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고독합니다. 내가 먼저 벽을 허물고 나면 재미난 일이 생깁니다. 상대방도 자기의 벽을 허뭅니다. 벽을 허무는 구체적인 방법은 나의 두려움, 나의 수치를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렵사리 자신을 조금 열어 보였는데 그것을 쿡 찌르면 안 됩니다. 그러면 마음 문을 닫고 다시 고독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처방을 주는 것도 안 됩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자신보다 열등하게 여긴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증을 나누어야 합니다. 자신이 겪었던 똑같은 경험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외롭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외로움은 수치심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외로움을 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의 벽을 허물고 남을 수용해야 합니다. 당장 자신을 확 노출시키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언젠가는 허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정교회를 만든 이유가 바로 이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전도를 위해서도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외롭다는 것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그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외롭습니다. 이런 분들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공동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외로움을 의식합니다. 이 외로움이 풀릴 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고백할 것입니다.

 

 

2. 교회 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교회

 

예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한 시몬 베드로의 고백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관한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교회의 소유권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은 교회의 소유주는 당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라고 하면 우리 마음대로 경영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 되신 예수님의 소원을 좇아 운영해야 합니다.

 

두 번째, 교회의 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교회를 죽음의 능력이 정복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멸망해서 지옥으로 가야 될 사람을 영생의 천국으로 보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런 능력이 역사하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외부의 압력도 내부의 부패도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생각합니다. 1949년에 모택동이 장개석을 쫓아내고 중국을 점령했을 때 선교사들을 다 쫓아내고 목사는 다 감옥에 투옥시키고 교회 문을 닫았습니다. 특별히 문화 혁명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의심이 간다고 가차없이 처형했습니다. 그러다가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택동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의 기독교인의 숫자는 100만 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등소평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1,000만 이상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입니다. 목사도 없고 성경도 없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이 나았고, 귀신을 쫓을 때 미친 사람이 나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약한 것 같지만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이 능력이 안 나타나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능력이 역사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할 수 없다라는 말은 없어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이런 큰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이 역사하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 교회의 권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열쇠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결정하면 하늘에서도 그 결정을 인정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는 회중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가능한 한 교인들의 의견을 존중해 드리려고 합니다. 정상적인 교회라면 교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역이나 직책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맡기는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맡기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권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흩어주는 교회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면서 주신 사명은 사도행전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 있으면 너희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인근 지역인 유대와, 그 외곽 사마리아, 더 나아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성령이 내렸습니다. 약속대로 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그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흩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때는 축복을 즐길 뿐만 아니라 흩어 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은 이웃과 주님을 물질로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흩으십니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는 것은 이웃을 도우라는 의미입니다. 교회 인원이 늘면 그 인적 자원을 흩어서 이웃을 도우라는 의미입니다.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흩어서 이웃을 도와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교회가 부흥한다고 자랑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흩으십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갈라집니다. 중요한 일꾼들을 타 지역으로 보내어 버리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주님의 소원을 풀어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흩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이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지 항상 듣고 그분의 소원을 좇아 흩어 주어야 합니다.

 

전도는 누구나, 언제나

 

성경에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고 마을로 내려가 전도하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추함, 모자람, 병든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치료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간증거리가 생깁니다. 간증이 있는 사람만이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자꾸만 자신의 약한 면, 추한 면, 모자라는 면이 눈에 보인다면 괴로워하지 마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은 여러분들을 절망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이런 죄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음을 감사하면서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이신 분이시고 우리는 초자연적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과거를 꿰뚫어 아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믿게 되었고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능력이 그렇게 많으시다면 기적을 2,000년 이전까지만 행하시고 요새는 왜 행하지 않으시느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때 캐서린 쿨만이 쓴 나는 기적을 믿는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기도 받고 낫는 것을 심리학적 현상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특히 노이로제나 그 때문에 생긴 육신의 질병은 마음이 편해지면 자연히 나을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책 속에는 심리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치유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피츠버그에 사는 용접공 얘기입니다. 작업 도중 쇳가루가 눈에 튀어 눈앞이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그런데 집회에 와서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그 사건의 기록이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분이며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세 번째, 노출시켜야 합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나의 행한 모든 것이란 5번 결혼했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수치스럽고 남에게 감추고 싶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노출시키는 데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마음을 꼭 닫고 성경만 가르치려 해서는 열매가 없습니다.

 

여인이 물동이도 놓아두고 전도하러 마을로 뛰어간 다음에 제자들이 음식을 갖고 와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음식을 먹으면 힘이 나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행하면 힘이 나고 생기가 돌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을 놓고 쉬면 생기가 팔팔 날 것 같지만 아닙니다. 더 피곤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양식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전도를 하다가 열매가 얼른 보이지 않으면 실망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저는 뿌리는 역할만 하고 거두는 것은 다른 사람이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산호세에 있을 때 엔지니어 한 분이 계셨습니다. 생명의 삶을 수강했는데, 믿고자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숙제도 다 했고 개근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휴스턴에 오지 2-3달 전, 생명의 삶을 끝낸 지 2년 만에 이분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크리스천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미군 목사를 만나서 감화 받기 시작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게 책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미국 목사님이 추천해 주신 책인데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자비로 그 책을 번역하고 출판했습니다. 목사님, 이 책을 몇 권 드릴 테니까 옛날의 저와 비슷한 사람 만나면 주세요.” 그리고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성경 공부 가르쳐 주실 때 제가 반항적으로 듣고 있었지만, 지금 지내놓고 보니까 제가 그 공부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아도 계속 복음을 전하십시오.” 이 말이 얼마나 제게 큰 용기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씨를 뿌려야 할 때가 있고, 열매를 거둬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씨 뿌리라고 하시면 뿌리고, 거두라고 하시면 거두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기 원하실 때에,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고백하고 쓰임 받으시는 전도자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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