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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예수 운영자 20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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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이클 프로스트

호주 몰링 신학교(Morling College)의 부학장이자, 부설 연구소 Centre for Evangelism and Global Mission의 소장. 그는 호주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지역과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미국 등지에서 활발하게 강연을 하고 있으며, 시드니 맨리에 Small Boat, Big Sea라는 단체를 세워 다양한 전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일상, 하나님의 신비,Longing for Love,Lesson from Reel Life(공저), Freedom to Explore등이 있다.

 

 

역자 신철희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대학교에서 정치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동서양 정치사상 연구와 기독교 서적 번역에 전념하고 있다.

 

Short Summary

예수의 어리석음이라는 개념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어쩌면 거룩한 어리석음이라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을 잘 모르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 ‘거룩한 바보는 동시대인들이 결코 발견하지 못하는 위대한 영적 자질을 일컫는 용어다. 사람들은 그분의 특이한 행동과 유머와 부드러운 친절이 어리석음의 증거가 아닌 거룩함의 증거라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이 제시한 원래의 예수님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새롭고혁신적이라고 여길 만한 매우 놀라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이 충격적인 관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바보짓을 하는 그분을 복음서에서 발견한다(그것은 사실 기독교에서 가장 잘 지켜진 비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전설적인 특성에 익숙해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항상 엄숙하고 신비적이며 초연한, 그래서 거의 유령 같은 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정보에서 너무나 동떨어져서 실재한 인물에 대한 현실감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예수님은 바보였다. 그리고 그분이 바보라는 사실이 그분을 가장 매력적이게 한다.

 

 

 

 

1장 진짜 예수님 일어나세요!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이 제시한 원래의 예수님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새롭고혁신적이라고 여길 만한 매우 놀라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이 충격적인 관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바보짓을 하는 그분을 복음서에서 발견한다(그것은 사실 기독교에서 가장 잘 지켜진 비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전설적인 특성에 익숙해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항상 엄숙하고 신비적이며 초연한, 그래서 거의 유령 같은 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정보에서 너무나 동떨어져서 실재한 인물에 대한 현실감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예수님은 바보였다. 그리고 그분이 바보라는 사실이 그분을 가장 매력적이게 한다.

 

예수님을 바보, 다시 말해 비극과 파괴를 향해 가지만 새롭고 역동적인 삶의 방식을 고안하는 떠돌이 음유시인으로 가장 특징 있게 묘사한 사람이 바로 누가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함께 여행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자 그 여행을 헛되지 않게 만든 동료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멀리 쫓아내신다. 그것은 그분이 혐오감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한 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그리고 그와 유사한 구절들)경외’(awe)로 가장 잘 번역될 수 있다. 어떤 것에 경외감을 품는 것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 두려움은 사람을 쫓아내지만 경외감은 사람을 끌어당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것을 바로잡아 이미지를 새롭게 조정해야 한다. 예수님도 인간이셨다.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셨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영감과 격려의 거대한 원천이 되시며 정말 닮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미지들 중 하나는 사실 복음서에 있다. 서정적인 갈릴리 바닷가가 배경이다.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사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일까? 하늘의 광채로 빛나고 계신 걸까? 삶과 죽음의 비밀을 가르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분은 그저 아침 식사 때 먹을 생선을 굽고 계신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바위에 찰싹거리는 파도와 지글거리며 익고 있는 생선 냄새를. 예수님은 귀를 간질이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조그만 장작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 식사를 위해 생선을 굽고 계셨던 것이다!

 

2장 여기 탐식자와 주정뱅이가 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전통적으로 무섭고 정열적이며 거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특유의 문화인 물질주의와 불신앙을 거부했으며 이스라엘의 본래 이상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금욕적이고 엄숙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런 특성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사역 기간 동안 무시당하고 최악의 경우 모욕을 당했던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임무를 받았다고 자임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틀에 맞지 않았다.

 

세례 요한과는 달리 예수님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먹고 마시는 것과 유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인 수다스럽고 소란한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러니 누가 탐식자와 술주정뱅이를 진지하게 고려하겠는가? 누가 창녀, 걸인, 강도, 반역자들의 친구를 현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겠는가?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진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예수님이 종교-정치 지도자에게 기대되는 모습과 너무 달라 사람들이 그분은 거의 바보 취급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속였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강요된 기준을 깨뜨렸고 그 결과가 꽤 뜻밖이었던 것이다.

 

3장 어릿광대 예수님

 

예수님이 바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거기엔 두 가지 측면의 의미가 있다, 첫째, 성공, 위신, 영향력이라는 이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은 (비록 훌륭하지만) 실패자이자 잘못된 길로 간 바보였다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더욱 도발적이다. 사실 예수님이 그분의 사역을 강화하기 위해 바보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둘 다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바울은 분명히 여기서 예수님의 어리석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예수님의 어리석음을 논증할 수 있다.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거의 이루신 것이 없다. 그는 개인적으로 재산을 전혀 모으지 못했고 두루두루 여행을 다닌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교육을 많이 받지도 않으셨다. 자신의 이름을 물려줄 아들을 남기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짧은 인생을 평범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매우 달갑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소비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소외당했으며 보통 범죄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로마 당국에 의해 고문 받고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바보였으며 그분이 전한 평화와 선의의 메시지는 그 분의 비극적 삶에 비추어 볼 때 무척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순진함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세련됨의 부족은, 단순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에 신선한 솔직함을 제공한다.

 

선지자로서 예수님은 의도적이고 전문적인 바보 역할을 하셨고 이는 매우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전문적인 어릿광대는 궁정에서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일원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 즉 궁정의 어느 신하도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군주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면서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국사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의 권력이었던 것이다. 왕이 궁정의 고상한 분위기 속에서 자기만의 생각이나 확신에 빠져 있을 때, 변함없이 왕의 인식을 재구성하고 상황을 보는 다른 방법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은 바로 그 어릿광대다. 물론 그는 재치와 웃음이 주는 친밀함 속에 자신의 메시지를 은폐하여 그런 성과를 달성했다.

 

역사를 통틀어 전문적인 바보들이 단순한 풍자가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그들은 그 사회의 기형아들’, 정신적으로 뒤처진 사람들,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 감정적으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잔인하고 불공평하게 대했다.

 

예수님은 전혀 이와 같지 않으셨다. 사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하셨다. 그분은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구성원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을 존엄과 자기 존중으로 채우신 것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예수님은 대단한 어릿광대였다. 나는 뮤지컬 가스펠”(Gospel)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에 명랑함과 유머를 불어넣으며 여행하는 일단의 음유시인들이라는 시각을 얻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한 풍자가가 아니시듯 단순한 어릿광대도 아니시다. 마태복음 21:12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패한 환전업자들을 쫓아내신 유명한 사건은, 예수님이 상당한 내적 힘과 끗끗함을 가진 사람, 결단력을 가진 사람, 진지하고 사려 깊은 믿음의 사람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커다란 폐를 끼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자연적인 바보와 의도적인 바보를 구분했는데, 예수님은 재미있게도 양쪽 모두에 해당되신다. 자연적인 바보로서 예수님의 단순함과 순진함은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자기가 속한 사회의 위선과 냉소적인 자기 이익 추구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단순한 정직성은 매력적인 동시에 사람들을 격분시킨다. 예수님은 또한 당시(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의 틀에 박힌 지혜를 슬쩍 피하면서 오히려 거기에 일격을 가하는 전문적인 어릿광대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정치 또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천치가 아니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인간사의 궁정에 있는 어릿광대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에게 매몰되어 현실과 유리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권력에 취해 영향력 있는 지위에 열중할 때 우리를 나무라신다. 그분은 반복적으로 우리의 실패와 단점을 상기시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행동하시는 것이 개인적인 이해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분의 어리석음이 가진 가장 큰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분은 오직 진실과 정의에 관심이 있으셨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충격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조정, 강압, 종속에 익숙해진 세상에서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매력있고 쾌활하셨던 예수님에게는 사고의 명확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예수님은 미움 받는 사마리아인을 영웅으로 만드심으로써 인종적 편견을 솜씨 좋게 공격하셨다. 예수님은 여성들을 믿음의 본으로 자주 세우심으로써 그들의 위상을 높이셨다. 그분은 주변의 권위적 구조를 비판하시며 저돌적인 용기와 대담한 자유분방함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세상을 어떻게 다른 눈으로 봐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이상하고 놀라운 분이셨다.

 

당신은 예수님에게서 귀여움 이상의 명랑함과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우리의 피곤하고 냉소적이며 독선적인 세계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재구성할 수 있는 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의 힘이 소진되었고 당신이 돈보다 적게 가지고 있는 것이 오직 영적 확신이라고 느낀다면, 바보 예수님은 당신이 찾고 있는 바로 그 재구성의 힘을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분이다.

 

4장 재구성의 기술

 

나는 재구성’(reframe)이라는 용어를 이미 몇 차례 사용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계속해서 실재를 재구성하셨다. 재구성은 사건의 의미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건을 인식하는 틀(frame)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미가 변하면 그에 대한 사람의 반응과 행동도 변한다.

 

다윗 왕에게 나단이 든 비유를 기억하는가? 고대 중동 왕국의 권력에 심취한 궁정의 맥락에서 보면, 첩을 왕의 침실로 끌어들이는 것은 수용할 수 있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여성의 헌신적인 남편과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은 비열하고 이기적인 행동이 된다. 나단의 이야기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는 진정한 결과를 볼 수 있도록 돕는 재구성을 제공한다.

 

의미의 재구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청소를 안하고는 못 배기는 여자와 상담했던 상담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증상은 너무 심해, 가족들은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수많은 예외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도 카펫에 난 발자국에 대한 그녀의 태도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카펫 위에 사람이 걸어간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꼭 사람들이 발을 내디딘 부분을 다시 진공청소기로 청소했다.

 

당신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마치 징검다리를 밟고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현관문에서 가장 가까운 거실 의자로, 또 다음 장소로, 온 집 안을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강박증에 빠진 여자는 그것이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상담을 받으러 왔다. 상담자는 그녀에게 눈을 감고 발자국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카펫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그녀는 기쁨을 느꼈다. 아마 상상 속 광경에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것이 당신이 전적으로 혼자라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느 곳에도 없음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어요라고 치료사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매우 괴로워 보였다. 그 때 상담자는 그녀에게 카펫 위에 몇 개의 발자국이 있는 것을 상상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제 다시 그녀 주위에 있음을 보라고 말했다. 이 훈련으로 그녀는 강박증에서 자유로워졌다.

 

이것이 의미의 재구성이다. 그녀를 가족으로부터 소외시킨 광적인 결벽증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내용, 즉 카펫 위의 발자국은 그대로 있지만 발자국에 부여된 의미가 변한 것이다.

 

많은 경우 예수님은 오늘날 양극화 반응(Polarity response)이라고 부르는 것을 끌어내기 위해 이야기나 비유 형태를 사용하신다. 양극화 반응은 반대 방향으로 급격하게 되돌아가게 하기 위해 특정 입장을 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교회에서 정말로 의기소침한 어떤 사람을 대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시험삼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의기소침해 있군요! 당신은 가장 우울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에요. 당신은 평생동안 그런 상태로 있었을 거예요. 당신은 이처럼 우울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경험도 해 보지 못했어요. 절대로요.” “아니에요, 평생 동안은 아니라고요. 지난주에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저는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그들의 입장을 과장함으로써 당신은 양극화 반응을 얻어낼 수 있다. 예수님은 몇몇 이야기를 통해 이와 같은 효과를 내셨다.

 

예수님은 이 기술을 반복해서 사용하셨다. 다음 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파하러 오셨다고 생각한 바로 그 율법에 충실하라고 대답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극적인 양극화 반응을 이끌어내셨다.

 

재구성 기술의 또 다른 변용은 처방이다. 예수님도 몇 번 직선적인 처방을 내리신 적이 있었다. 한번은 한 부자 청년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강력한 재구성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매우 효과적이고 영감을 주는 처방은 상황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다. 요한복음 5:2-18에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멍청구리짓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년 간 누워 있었던 한 가난한 절름발이 남자에 관한 것이다. 그는 혼자서 몸부림치며 기어서 연못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당연히 항상 누군가가 그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 광경이 그려지는가? 연못 옆에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다니 불쌍하기 그지없다. 예수님은 옆에 오셔서 그에게 낫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쉽게 따를 수 있는 처방을 내리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즉시 그는 일어섰다. 예수님은 이 남자의 상황을 재구성하셨다. ‘만약 네가 옆으로 기어서 연못까지 갈 수 있다면, 나를 신뢰함으로써 일어날 수는 왜 없겠느냐?’ 이것은 너무 단순해서 효과를 일으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훨씬 더 복잡한 계획에 거의 40년 동안이나 매달려 왔던 것이다.

 

기적들이 하나님 나라가 임재함을 증거하기 위해 행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이 그분이 치료하는 사람들 안에 더 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재구성의 전략을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예로 내가 뜻밖의 의견’(occasional comment)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정기적인 만남에서 남자는 매주 내 친구목사에게 자기 아내에 대해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아내의 좋은 점을 보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거의 효과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아내에게 모질게 구는 것을 그만두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이것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그 남편은 보세요, 제가 목사님께 와서 항상 제 아내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라고 말했다. 이 말에 친구는 , 아닙니다, 저도 성도님만큼 부인을 미워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그는 아내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감히 아내를 미워하도록 허용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의 입장을 과장하고 그 입장에 동조함으로써 내 친구는 그 상황을 극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 뜻밖의 의견 하나가 돌파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재구성의 사역은 놀랍고 단순하고 개방적이며 순진한 바보의 사역이다. 단순성과 개방성, 정직성과 순진함은 재구성 사역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들이다. 그리고 그 무장해제 시키는 형식의 이면에서, 바보의 사역은 다른 접근법들은 절대 일으킬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 낸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주신 새로운 틀이,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 변색되고 먼지가 쌓여 간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재구성의 수많은 현대적 예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당신이 원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며 그분이 주변 세상을 미묘하고 솜씨 좋게 변화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혹 그분이 우리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어떤 인식들도 재구성하실지 누가 알겠는가?

 

5장 인간조건을 재구성하시는 예수님

 

바보 예수님과의 여행은 예수님이 동시대인들의 죄와 죄의식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하셨던 방법을 살펴봄으로써 시작된다.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시대에도 죄는 단지 특정 규칙이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면 당신이 살인이나 간음 또는 큰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율법을 아주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하시는 것을 보라.

 

예수님과 유대인 율법사(10:25-37)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한 유대인 율법사가 와서 말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모세의 율법을 이루라. 그러면 정녕 네가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이 하신 방법은, 다른 점잖은 풍자가들이 했던 것처럼, 비판하는 대상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의 도식과 사고 체계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오직 그 랍비와 그의 근본주의적인 율법주의를 진지하게 대함으로써 예수님은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드러내실 수 있었다. 모세의 율법을 이루라, 그러면 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직 너 자신의 노력에만 기초한 율법주의와 종교적 경건에 맹목적으로 헌신된 삶을 살아라.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너무 반대되는 것이어서 그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랍비는 아니었다. 그는 더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그러리라는 것을 예수님도 틀림없이 알고 계셨으리라.

 

그 랍비가 말했다. “글쎄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에는 수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지요. 누가 제 이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진정 명인다운 것이었다.

 

예수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한 남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정도로 맞았지. 한 제사장이 거기를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자신도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이쪽 저쪽을 살피면서 길을 재촉했다. 나중에 레위인도 지나면서 두려워했으며 그렇게 위험한 여행에서 감히 꾸물거리고 싶지 않았지. 그 때, 잠시 후 한 사마리아인이 우연히 지나치게 되었다. 랍비, 우리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놈들을 얼마나 경멸하는지, 그리고 그들도 우리를 얼마나 경멸하는지 말해 줄 필요도 없겠지?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벌거벗은 몸을 덮고 상처를 싸매 주고 자신의 나귀에 태워서 가장 가까운 여관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가 다 나을 때까지 드는 숙박비와 치료비를 미리 지불하였다. 너는 코웃음을 치겠지. 그것은 너무나 자비로운 행위라서 특히 사마리아인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기 힘들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말을 한번 믿어 봐라.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길에서 두들겨 맞은 사람을 만난 세 사람 중에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냐?“

 

예수님은 흥미를 가지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 랍비의 답변을 기다리셨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죠.” 예수님은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 이 말로 토론은 끝이 나고 예수님은 서서히 랍비에게서 멀어져 가셨다.

 

혼자 남게 되자 그는 지나간 단계를 되짚었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자 그는 내가 만나는 사람 중 곤궁에 처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내 이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영생을 원한다면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줘야 한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과 엄청난 비용, 큰 희생과 관련이 있다. 처음으로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철저하게 부딪히게 된 그 불운한 랍비를 상상해 보라. “그건 불가능해. 나는 심지어 내 가족의 필요도 완전하게 채워 주지 못할 걸. 나는 정말로 시간, 에너지, 동기, 관심, 사랑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해. 그렇게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나의 능력 밖이야, 그건 불가능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의 상징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는 절망의 상징이다. 그의 터무니없고 믿기 힘들며 우습기도 한 자비로운 행동을 두고 예수님이 가서 이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이렇게 울부짖을 것이 틀림없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심술궂고 계산된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하다. “맞다.” 그것이 핵심인 것이다.

 

어떤 도식의 오류를 드러내 강조하기 위해 그 도식의 책략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강력한 기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화에서 예수님의 의도가 유대교 전체를 조소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유대교의 희망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주장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보다 예수님은 근본주의의 독선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자가 스스로 그것을 비웃게 함으로써 유대교 율법주의를 조롱하셨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추종자들을 묶고 가두는 모든 종교적 율법주의를 조소하셨다.

 

회개는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만큼이나 단순하다. 우리 문화는 불편함을 최소화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교정 장치다. 난로 위의 뜨거운 팬에 손을 데었을 때 우리는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그 고통에 악담을 퍼붓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열기가 우리를 아프지 않게 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촉감을 인지한다. 우리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교정 장치다.

 

그러나 회개는 개인의 가치에 민감하게 귀기울일 때에만 자기를 교정할 수 있다. 잠시 동안 죄를 회개할 시간도 가져야 하지만, 우리 자신을 항상 사랑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건강한 자기애가 있을 때 회개는 균형을 유지해 주고 독선과 교만을 교정해 줄 수 있다. 회개와 자기애 사이의 균형은 복음이 엄청난 열정으로 끌어안는 긴장이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을 전적으로 재구성하셨다. 한때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던 것이 이제 우리가 얼마나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가 비록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할 만하다고 여기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름답고 훌륭한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6장 용서를 재구성하시는 예수님

 

만약 십계명 같은 율법이 오직 우리 자신의 끔찍한 무능력을 상기시키는 역할만 한다면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이에 예수님은 우리가 곤경에서 빠져나갈 방법도 재구성하신다. 그것은 외부적인 규율들에 더욱 헌신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종교가 신의 선한 은혜를 받기 위해 택하는 전략과 같다는 고대 근동 지방의 모든 신앙에 정면으로 반대하셨다. 예수님에게 종교는 이미 그의 백성들에게 선한 은혜를 베푸신 신에 대한 헌신의 표현이었다. 예수님이 이것을 얼마나 현명하게 이루셨는지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라. 예수님이 유대 공동체의 보수적인 종교 지도자들 중 한 명인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으신 이야기를 살펴보자.

 

예수님과 여인(7:36-39)

이것은 평범한 사교 모임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명성은 커져 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대의를 이룰 투사로, 거리의 언어를 말하는 종교 교사로, 믿음을 실제적으로 적용하여 종교와 일상생활을 이어 주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달성할 수 없는 거룩함을 지닌 사람들, 분리되고 비밀스러운 고대 전통의 수호자로 존경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정통 신앙의 수호자들이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잠재적으로 매우 위험한 존재라고 여겼다. 만약 한 집단의 힘이 신비로움과 두려움과 불확실성, 그리고 고대 비밀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에서 나온다면, 그 힘을 빼앗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비밀스런 책략에 대낮의 밝은 빛을 비추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교를 더욱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만드신다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유지해 온 신비로움을 서서히 훼손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특이한 접근법에 대해 예수님과 토론하기 위해 저녁 식사에 그분을 초대한 것이다. 늘 그렇듯 이런 저녁 식사는 예수님께 굴욕감을 주고 그분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한 기회에 불과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런 초대를 받고 들어가고자 하셨던 바리새인들의 세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 바리새인은 거룩한 삶, 문자 그대로 모든 불순한 것들로부터 분리된 삶에 자신을 헌신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불순함에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정결 의식을 끈기 있게 지킴으로써 표현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반드시 결례(潔禮, purification)를 끝낸 다음 식사를 했다.

 

사실 그들은 자주 종교 모임을 만들었으며, 식사를 하며 종교적 토론을 하기도 했다. 초빙 강사나 저명한 사상가도 종종 강의에 초대되었다. 그랬기에 예수님처럼 점점 인기를 모으고 있던 분이 시몬 같은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된 것은 그다지 이례적인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가는 36절에서 예수님이 그 초대에 응하셔서 시몬의 집에 기대 앉으셨다’(reclining)고 말한다. 손님들은 탁자 주위에 권력 순위로 배열된 소파에, 왼쪽 팔꿈치로 턱을 기대 누웠다. 그러면 소파 뒤에서 대야를 들고 서 있던 하인들이 신발을 벗은 손님들의 발에 물을 붓고 깨끗이 씻어 주었다. 그 하인들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연회와 오가는 대화를 구경하기 위해 서 있었다. 그들에게 그것이 허락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연회가 사적인 저녁 식사 모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을의 큰 행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인이 이런 의식 중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빠뜨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 그럴 경우 손님은 이를 심한 모욕으로 여겼다. 특히 발을 씻는 것(씻지 않은 발은 무가치함의 상징이었다)과 뺨에 입 맞추는 것은 연회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였다. 이것을 빠뜨리는 것은 손님에 대한 비참한 경멸감을 표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 주인은 입을 맞추지 않았고 발을 씻겨 주지도 않았다. 시몬이 예수님을 푸대접한 것은 분명히 계산된 것이었다. 그는 분명히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세련되고 우아한 기성 체제의 모임에 불러들여 조롱하고 비웃으며 당황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한창 주가가 올라가고 있는 나사렛 출신의 랍비를 자신의 저녁 파티에 초대한 것이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그녀는 창녀였다. 거리의 여자였다. 도시에서 열심히 돈을 버는 이름 없는 빈자들 중 한명이었다. 공식적인 연회에 눈에 띄지 않는 군중이 모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잔치가 끝난 후 창녀가 일거리를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바리새인의 집에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거리를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을 들을 때 자신이 존귀한 사람이라는 느낌과 자기 존중감이 처음으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 랍비는 여자들과 함께 다녔으며, 그 중에는 한때 창녀였던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님에게서 우러나오는 포용과 인내의 느낌은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내면을 변화시켰다.

 

예수와 같이 거룩한 사람은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그분에 대한 자기의 헌신을 표현할 수 있는 선물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창녀인 그녀는 재산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옥합처럼 생긴 작은 병을 목에 가죽 끈으로 매달고 다녔다. 그 안에는 값싼 향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포푸리처럼, 그녀의 가슴 사이에서 일종의 방취제 구실을 했다. 당신은 땀을 뻘뻘 흘리는 무거운 남자들 밑에 누워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여자에게 이 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부정함의 상징을 예수님께 드리기로 결심했다. 그 병은 그녀의 매춘을 상징하는 배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예수님께 향수를 드린 것은 큰 영감에서 우러나온 행위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몬이 계획적으로 예수님을 능멸하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을 모욕하려고 계획한 각 단계가 순서대로 진행될 때, 즉 문안 입맞춤을 하지 않고 발 씻겨 드리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주인과 멀리 떨어진 곳에 앉게 했을 때, 그녀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그녀 자신의 존귀함과 자부심을 회복시킴으로써 삶을 변화시킨 분이었다. 이 분이 사람들 앞에서 창녀와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분에게 입맞춤조차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그분의 발을 더러운 채로 놔둘 수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그분을 쓸모없는 사람처럼 대우할 수 있을까? 강렬하게 뒤엉킨 헌신과 감사와 격노의 감정에 압도된 그녀는 익명성의 안전을 벗어 던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앞으로 나서자마자, 그녀는 적의에 차서 자신을 바라보는 무리의 시선을 발견했다. 그녀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창녀가 어떻게 랍비의 뺨에 입 맞출 수 있겠는가? 모든 눈이 자기에게 쏠려 있는 것을 깨닫고 혼란과 심한 당혹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예수님의 더러운 발 앞에 몸을 던져 연거푸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감사한 마음에 미친 듯이 예수님의 발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고 애정을 예수님께 쏟아놓으며 평생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울었다. 예수님의 발을 닦을 수건이 없다는 것과 자신의 옷도 길거리에서 더럽혀졌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느슨하게 묶인 자신의 머리를 풀었다.

 

중동에서 여자가 머리를 푸는 것은 성행위를 시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여염집 여인이 오직 자기 남편에게만 보여 주는 친밀하고 애정 어린 동작이었다. 사실 탈무드는 다른 남자들 앞에서 머리를 푸는 여인은 돌로 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시몬의 집에 있던 그 여인은 남편이 없었다. 어느 누구의 명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집 주인은 격노했다. 바리새인의 집에서 창녀가 랍비를 유혹하는 일은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었다.

 

이제 대단히 눈에 거슬리는 경솔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여인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시몬이 하인들에게 자신을 방에서 끌어내라고 손짓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 사이에 있는 향수병을 끄집어냈다. 그녀는 서둘러서 예수님의 발 위에 향수를 붓고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기진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시몬은 이 충격적인 광경에서 비뚤어진 즐거움을 이끌어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사렛에서 온 랍비의 신뢰성에 흠을 내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창녀가 그의 다리를 얼싸안고 엎어져서 그렇게 선정적으로 행동하도록 놔두는 것보다 더 좋은 소재가 어디 있겠는가? 그 바리새인은 셰익스피어가 방백이라고 부르는 대사를 했다. 그는 거만하게 비웃으며 예수님의 경솔한 행동을 경멸적으로 비난했다. “이 사람이 진실로 선지자였다면 그는 자신을 유혹하는 이 여인이 누구이며 어떤 종류의 여자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창녀다라고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예수님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아셨다는 바로 그 사실로 선지자임을 증명하셨다. 예수님은 그녀의 회개를 감지하셨다. 그녀의 안도감을 느끼셨고 용서받은 것에 대한 그녀의 기쁨을 아셨다. 관능적인 행동밖에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시몬이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풀어진 머리칼을 보시고 헌신과 감사와 회개를 보셨다. 시몬은 똑같은 것을 보았지만 욕망과 방탕 밖에 보지 못했다. 그 바리새인은 절대적으로 재구성이 필요했다. 그는 사물을 보는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위대한 재구성자가 이제 그것을 하고자 하신다. 단호하면서도 노기를 띤 어조로 말이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시몬(7:40-47)

이제 드디어 놀림 받기 위해 이 자리에 초대된 예수님이 바보 연기를 통해 극적 결과를 낳기 시작하신다. “시몬아, 내가 네게 할 말이 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느니라.” , 어떤가? 하나는 빚을 많이 졌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많이 지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의 필요는 동등하다. 둘 다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이다.

 

말해 보라 시몬아,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은 바보 특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미소를 지으셨음에 틀림없다. 시몬은 그 대답을 모르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논리적으로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장담에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그는 덫에 걸렸다. 그가 예수님을 능욕하기 위해 그분을 초대한 품위 있고 세련된 연회는 익살극으로 변해 버렸다. 이제 모든 압박은 시몬에게 가해졌다. 궁지에 몰린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시몬이었다.

 

이 여자를 보았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의 행동은 매우 모욕적인 것이었다. 손님이 집 주인의 환대 여부를 묻는 것은 무례함의 극치였다. 그것은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릿광대를 가장하여 과감히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음속에 가지고 계셨던 생각은 집 주인인 시몬을 비난하는 것 이상이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라.”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고 그 목소리는 아마 여전히 노기를 띤 채 날카로웠으리라.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재구성의 가장 극적인 요소는 두 사람 모두 빚진 자라는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물론 여자가 더 많은 빚을 졌다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의 두 사람처럼 그들은 똑같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예수님의 가장 통렬한 착상은 바리새인과 창녀가 하나님께 진 그들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전적으로 달랐다. 예수님이 하신 재구성의 효과는 네 가지 단계로 시몬을 때렸을 것이다.

 

첫째, 나사렛에서 온 이 랍비가 바리새인이자 죄인인 자신이 하나님께 빚을 졌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이것은 그가 창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진 빚을 되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셋째, 그 이야기속의 은혜를 베푼 사람처럼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의 빚을 탕감하셨고 다시 말해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동일하게 그 창녀의 빚도 자비롭게 탕감해 주셨다. 그리고 넷째,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용서에 대한 기대로 매우 즐거워했어야 했다. 창녀가 많은 죄를 용서받아 훨씬 더 감격해했겠지만 이것이 빚을 탕감 받은 바리새인의 기쁨이 감소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얻은 이 네 단계의 깨달음으로 시몬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렸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왜 나는 이 창녀와 같은 헌신과 경배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매우 충격적인 답변은 너는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무 교만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여인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7:48-50)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이 말에 여인은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를 필사적인 헌신의 행동으로 이끈 것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예수님은 단지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선포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을 위해 값진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가장 적절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결과로 엄격한 종교적 생활 방식을 지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비난하신 적이 없다. 만약 그런 생활방식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느끼는 헌신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 우월감의 표시나 권력의 훈장이 될 때는 예수님은 그것을 심하게 책망하셨다. 이것이 바리새인 공동체가 끊임없이 지은 죄였다.

 

본질적으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은혜라고 불리는 것이다. 은혜는 그분의 사랑의 선물이다. 그리고 물론 당신은 선물에 값을 지불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격은 없지만 당신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고 상상함으로써 예화를 들어보기로 하자. 내가 도착했을 때 나는 집 앞 베란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 가족은 모두 현관에서 입맞춤과 악수로 나를 맞는다. 진수성찬을 나눈 후 포르투갈 산 포도주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당신은 나의 근심, 투쟁, 희망, 두려움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다. 나는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나를 받아들이는 이들에 둘러싸여 매우 편안함을 느낀다. 이것이 은혜다. 그 때 내가 시계를 보고서, 시간이 너무 늦어 당신의 시간을 더 이상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서면서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에 손을 뻗으며 말한다. “참 좋은 밤이었어요. 얼마를 지불하면 되죠?” 당신은 그런 모욕에 어떤 감정이 들겠는가?

 

7장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재구성하시는 예수님

 

목사님 말씀은 주님을 더 잘 섬길수록 더 크고 좋은 면류관을 받는다는 뜻입니까?”라고 나는 따지듯 물었다. 목사님은 매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가 알고 있다시피 그것은 천국에서 살게 될 집에도 해당되는 거야라고 덧붙이셨다.

 

하나님께 천상의 신용점수를 쌓아가는 제도는 내게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결국 이 곳 이 생에서의 삶이 작동하는 방식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총애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나눠주시고 책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등식은 나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날 때 깨지게 된다. 욥은 진실로 선한 사람인데 나쁜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욥의 이야기는 쓸데없이 편협한 신학적 전제들의 실체를 폭로한다.

 

9장 무모함에 대한 제안

 

우리는 창조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역자이며 그분과 협동 관계를 맺는다는 쿠쉬너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인간의 노력과 신의 노력 모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이 인간 없이도 잘 해내실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 없이도 일을 해 내실 수 있지만 그런 방식을 선호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인생이라고 불리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과정 가운데 인간이 동역자가 되어 주기를 더 원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그냥 빵나무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내가 그분이 주신 자원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죄란 단지 특별한 도덕적 규범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각을 재구성하신다. 죄는 인간의 체질적 본성이다. 우리가 진실에 대한 책임과 타협할 때 우리의 대답은 보통 나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나는 거짓말쟁이다로 재구성하신다. 그것은 어떤 규칙이나 규범을 지키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뱀이다.

 

용은 날 수 있는 뱀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 안에는 뱀으로서의 한계 너머로 솟아오르려는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열망이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 죄가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이해에서 어리석은 점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도) 예수님 안에 그리고 그분을 통해 용서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에게 말씀하신 두 빚진 자의 비유는 이 점에서 예수님의 생각을 매우 잘 보여 준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와 무능력과 연약함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용서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날 수 있게 한다.

 

긴장 관계에 있는 이 두 가지 반대되는 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 인생에서 우리가 한 개념을 다른 개념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우리의 목표는 균형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용서에 대한 의식과 죄성에 대한 의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와 같다. 그 균형을 발견하고 유지하려는 투쟁은 가장 무모한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임무다. 오직 무모한 사람만이 그 긴장을 받아들일 때 오는 더 큰 기쁨을 안다. 사실 당신이 이것을 더 잘 이해할수록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더욱 당신의 영혼을 고양한다.

 

10장 포기하지 않는 바보 예수님

 

자신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조차 평생 동안 끈질기고 꾸준한 충성을 보여 주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다. 자식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몇몇 부모를 만났다. 언제나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바보처럼 느껴져요. 제 아이가 저를 단지 현관의 발털개처럼 대하고 저를 밟고 이용하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저는 그애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너무나 충실하시고 헌신적이시며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예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런 점에서 나는 예수님이 매우 남성적이라고 생각한다. 쫓아낼 수 없는 애인처럼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시 돌아오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될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신다. 하나님처럼 예수님도 천국의 사냥개.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고뇌보다 이 충성심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없다. 같이 간 동료들에게 기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 후 그 곳에 쓰러져서 우셨다. 그러나 그들은 선생님의 근심을 공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잠들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외롭고 두려워서 땅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당신은 이토록 무너지신 예수님을 상상하는 것이 괴로울지 모르나, 내게는 이것이 고무적이다. 나는 이 사실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무능력 때문에 기꺼이 헌신적으로 희생하셨다는 사실은 십자가를 믿음의 최고 상징으로 만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행길의 마지막에 이르게 되었다. 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예언자적 성향과 결별하셨던 것과, 바위투성이 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최후의 죽음으로 가는 것을 보여 주었다. 여행을 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하나님, 그리고 서로를 보는 새로운 방식에 눈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겟세마네와 십자가로 가게 한 그 헌신에 압도되었다. 그것은 독특하고 어려운 여행이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여행이다. 고된 노력과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여행이다.

 

바보 예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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