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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운영자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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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찰스 스탠리 지음/최원준 옮김


 

 

Short Summary

지금까지 나온 성령에 관한 책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아주 경험론적인 것으로서, 이런 책들은 우리 삶에 실제로 적용되는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교리적인 것으로서,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이 삶에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최고의 성경 공부 교사, 찰스 스탠리는 이 책에서 경험과 교리를 하나로 조화시킨다. 그래서 신학적인 배경이 탄탄하면서도 실제적인 성령 충만에 관한 지침을 제공한다. 저자는 "단지 인간적인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런 삶의 모습과 태도를 우리에게 바라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라고 역설하면서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삶인지를 알려 주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의 모습, 성령의 은사, 성령 세례, 성령의 표적 등에 대해서 심도 있게 전해 준다.

 

 

1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1. 성령 충만하여 아름다운 삶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삶은 활기도 없고 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수양과 결심 외에는 그리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삶이다. 나는 두 가지 신조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을 자주 만난다. 첫째, 완벽한 사람은 없다. 둘째, 하나님은 그것을 이해하신다. 그들에게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가닥의 실이 서로 꼬여 있는 실타래와 같은 것으로, 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그 실타래 끝에 약속된 천국뿐이다.

 

제삼자의 눈에 비친 그런 신자들의 생활 방식과 정신 세계는 믿지 않는 이들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신자들의 이혼율은 믿지 않는 이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끝없이 목사인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한때는 구원의 기도를 드린 적도 있으나 결국은 기독교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들을 보면 나는 당혹스러운 정도를 넘어 근심에 빠지고 만다. 물질적으로 모든 것이 채워져 있지만 성령이 결여된 삶을 살아가는 부부들을 볼 때면 나는 염려스럽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 가정, 거기에는 영원한 즐거움도, 평안도, 사랑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관계가 가져다 주리라 생각했던 만족감을 찾아 또 다른 곳을 헤매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막 희망을 버리고 포기하려 할 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 : 18)."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런 약속을 하신 지 며칠도 안되어 주님은 제자들의 곁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셨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리들 중에는 버려진 고아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방향 감각과 삶의 동기, 그리고 용기를 상실한 채 자신들을 귀속시킬 명분을 찾고 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지 (인간의) 최선을 다하는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성령을 보내실 필요는 없었다. 결국 최선이란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인간의 최선, 그 이상의 것임을 명확히 하셨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 : 7)."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1 : 48)."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을 통해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가장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성령의 도움이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진리이다. 이 사실은 이제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해방시켜 준다고? 오히려 우리를 좌절시킬 뿐인데.”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진리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확신이 있고 난 후에야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우리는 성령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매일 아침 집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잭 테일러는 그의 책 승리하는 삶의 요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농부였으며 그것은 농사일에 열심을 다한 결과였다. 나는 신앙에 있어서도 아버지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이후 거의 20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은 모래밭에서 땀흘려 일하는 소작농의 삶과 같았다. 나는 그 밖의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그런 삶을 견디어 냈다. 아무도 나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2. 첫 만남

열네 살 때, 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나는 너무도 명확하게 그 부르심을 들었는데, 아마 천사장 가브리엘이 내 앞에 직접 나타나 얘기를 해주었다 해도 그처럼 명확하게 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 부르심은 내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왔다. 바로 내 안에 거하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나의 접근 방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성실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아기였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몇 년 뒤에 재혼하셨다. 재혼은 어머니가 하신 일 중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계부로 인해 우리 모두의 삶은 끔찍하게 변했다. 상황이 그렇게 나빴지만 나는 비뚤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대하는 계부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나 그런 미움을 마음속에 쌓아 놓지는 않았다. 나처럼 좋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란 많은 아이들이 비뚤어진 성격으로 인해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성령께서는 나와 함께 계셨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존재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가장 큰 조력자이다. 결코 가상의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행하시는 방법에 익숙지 않은 연유로 우리는 그분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분을 잊고 생활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분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낼 수도 없다.

 

성경은 성령을 그것이 아닌 로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성을 부여하고 있다. 성경은 특히 성령이 다음의 세 가지 인성 즉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령은 어떤 힘이나 에너지의 원천과 같은 비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사고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인격체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며 우리가 당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다. 물론 성령은 평범한 인격체 그 이상의 존재이다. 그분은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신비로운 실체의 한 부분이다.

성령이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면서 나는 성령께 다음과 같은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 어떤 특정 문제를 놓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 나는 그분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성경을 읽을 때 내 눈이 열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도 했다. 그렇게 여섯 달 정도가 흐르고 난 뒤 성령께 이야기하는 일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령은 그리스도인인 나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자리잡고 계신다.

 

3.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1957년 신학교를 마친 나는 프루트랜드 침례교회와 그 맞은 편에 있는 프루트랜드 성경 연구소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나는 설교는 그런 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목회자를 상대로 가르치는 일은 달랐다. 내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토레이 목사가 쓴 성령에 관한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토레이 목사는 그 책에서 성령의 지시나 권능 받는 일을 너무나 간단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내게 커다란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 금식에서부터 간구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나의 노력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강의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절박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 그 책 어디에선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비밀을 찾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당시 내가 그렇게 절박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순서였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또 다른 가르침을 받아야 할 때였던 것이다.

 

성경은 네 군데에서 ‘oikeo'란 헬라어(’거하신다‘, ’내재하신다‘, ’사신다‘)를 사용해 성령과 신자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 중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묘사가 가장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 : 16).” 분명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이란 구절과 성령의 성전이라는 구절을 동등하게 놓음으로써 성령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또한 ‘oikeo'라는 단어는 영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성령은 신자들 안에 영원한 거처를 정하신다는 말이다. 그는 우리를 거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으로 삼으신다. 그는 우리 안에 머물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신자들을 성전이라고 묘사함으로써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처를 영원히 옮기셨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떠나 성령의 인격을 통해 당신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이다. 성경은 성령이 약속대로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1 : 13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4 : 30)."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성령을 보신다.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 즉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일을 하나님이 끝내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 영적 존재다. 우리가 자신 외에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우리는 영적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디데이까지 2주가 남아 있었다. 나는 성령님, 내 안에 계신다면 어떻게든 해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내 안에 거하시기만 하면 내가 모든 종류의 새로운 잠재력을 지니게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토레이의 책을 읽어 가는 동안 내 자신이 처한 곤경을 아주 적절히 묘사하고 있는 구절을 하나 발견했다.

 

모든 거듭난 이들과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을 깊은 곳에 감춰놓고 의식조차 못하는 신자들이 매우 많다. 손님을 구석지고 눈에 안 띄는 곳에 모셔 놓고 우리 자신조차도 그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와, 우리가 손님에게 온갖 신경을 쓰는 경우는 분명 다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결코 성령 충만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한다면, 거듭난 이들은 모두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 ‘성령 세례또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거듭난 이들 모두가 소유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 안의 금단의 장소로부터 내 일상 생활 속으로 성령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내가 바란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내가 제대로 강의를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첫 수업 날짜, 그 위기감은 바야흐로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나의 다음 행보를 준비해 주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4. D-Day

금요일 오후 4. 내가 맡은 클래스의 첫 수업은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나는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책도 읽고 암기도 했으며, 금식도 했고, 기도도 드렸다. 뿐만 아니라 학교측과 협상도 해보고 호소도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전과 다를 바 없이, 성령 충만한 삶을 이해하기엔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하고 난 뒤에 나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읽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 : 1415)."

내 감정은 거의 억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무엇을 구하면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게 성령의 힘을 경험토록 하는 게 주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포기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아니시죠?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만 의지할 생각입니다. 그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끝내자마자 놀랍게도 자신감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것은 지난 3개월 동안 내게 다가왔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내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고 또한 방언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외에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에 나는 성령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는 물리적인 증거를 찾아 헤맸었다.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이 나는 무언가 볼 수 있는 것을 원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 구절의 성경 말씀이 내 마음속에 다가왔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 : 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 : 2)."

 

하나님은 나보다도 더욱 간절히 나의 성령 충만을 원하셨던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오직 그분만을 믿고 그 믿음 위에 살아가는 것이었다. 월요일 아침, 나는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첫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성령과의 첫 만남은 내게 엄청난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불안감이 밀려올 때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계심을 기억했다. 첫 수업을 한 그날 하루 동안 나는 내내 이런 기도를 했다. “성령님, 나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제게 맡기신 일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채우소서.” 성령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강의실 분위기와 학생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믿음으로 가득 찬 삶이다. 우리는 구원과 연계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사를 들여다보면 이상스럽게도 거기에는 믿음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다가온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 최선을 다해 풀어 보려고 한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우리의 성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부인하며, 성령을 보지 못하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 목사는 말한다.

 

우리 신자들에게 들려줄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성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속의 시대가 아닌 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과 에베소서에 나타난 성령 충만의 차이점은 반드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랬듯이 바울의 명령대로 행동해야 할지, 아니면 기다려야 할지를 몰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는 것, 또는 성령에 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성령의 지배하에 놓는 것을 말한다. 마치 두려움이나 슬픔에 사로잡히는 것과 유사하다. 슬픔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외의 생각이나 감정은 뒷전으로 밀어 놓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이해하고 또한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일이 선행돼야 하는데, 첫째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이다. 내가 경험했던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나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깨어짐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절망이라고 불렀다. 그 명칭이 무엇이 되었건 공통된 점은 그 과정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정서적 어려움의 골짜기, 그 골짜기에는 우리들의 영적 성장을 도와줄 가장 비옥한 토양이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어려움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에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름다운 삶의 비밀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질병, 재정적 곤란, 자녀 문제, 직장 문제 등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신다.

둘째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일이다. 의존과 항복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눈에 탈출구가 보이는 한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때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칙은 그 사람이 붙잡을 수 없는 거리에서 기다리다가 그가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다가가는 것이다. 성령과 우리의 관계에도 똑같은 규칙이 적용된다. 성령의 뜻에 따르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의 의지를 버려야만 한다.

 

구원이 그러하듯 성령 충만한 삶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곳까지 이르는 길은 매우 좁다. 그리고 지름길도 없다. 모든 것은 시기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순례의 길에서 우리 각자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하는 문제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막다른 길에 처해 있는가? 아직도 무언가를 잡으려고 허우적대는 물에 빠진 사람,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인가? 당신은 영적 성장의 행로에서 어디까지 왔는가? 내게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능력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으로 내게 맡겨진 매일매일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5. 주님은 포도나무요 나는 그 가지라

마이애미 교회로 옮겼을 때 그곳 상황은 아주 좋았다. 그런데 나를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몇몇 신자들이 안수 기도 시간만 되면 앞으로 나와 기도를 청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똑같은 사람들이 나와 이전과 똑같은 죄를 고백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들이 싸우고 있는 그 대상과 나도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설교를 준비할 때나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할 때에는 성령이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분명 성령이 계시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로 고민하면서 나는 매주일 저녁, 갈라디아서 강해를 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몇 주 후면 성령의 열매에 관한 구절을 강해해야 했다. “나 자신도 성령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부분에 대한 강해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한번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정확히 66일 토요일 오후, 집 뒷뜰에서 강해 준비를 해보려고 뒷문을 열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책이 눈에 띄었다. 몇 주 전 아내가 산 책이었다. 아내는 내가 그 책을 읽어 봐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때까지 손에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 책은 레이먼드 에드먼이 쓴 그들이 발견한 비밀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은 20개의 짧은 전기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각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의 이른바 변화된 삶을 기록하고 있었다.

 

바로 그 책의 첫 장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셨다. 허드슨 테일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하나님은 테일러에게 성령 충만한 삶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해 존 매카시라는 인물을 쓰셨다. 역시 선교사였던 존은 테일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전해 듣고 테일러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내 마음속에 전구가 하나 켜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포도나무의 가지는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햇빛과 공기를 얻고자 부단히 노력한 결과도 아니고, 꽃에는 아름다움을, 잎에는 푸르름을 가져다 주는 생명의 기운을 얻고자 노력한 결과도 아니다. 단순히 나무의 본체에 순종해 그것과 하나가 된 결과이다. 꽃이나 열매는 자연적인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대가 없이 주어지는 열매를 노력과 투쟁을 통해 맺고자 하는가? 그래선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시켜야만 한다. 주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항복해야 한다. 주님의 관대하심에 의지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 글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기 시작했다. 나는 매우 행복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열매를 맺는 일은 나무가 하는 거야. 열매는 나무로부터 가지로 흐르는 수액의 산물이지.’ 나는 찬 바닥에서 무릎꿇은 채 세 시간을 울어댔다. 그리고 내 마음의 눈을 열어 나로 하여금 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아주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이후 몇 주 동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이 내 뇌리에서 맴돌았다. 나는 내 어깨에 얹혀 있던 큰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자유로운 마음으로 갈라디아서 강해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내 삶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프루트랜드에서 일어난 일이 나의 선교 사명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면,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던 중에 내게 일어난 일은 내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 삶에 모든 종류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성령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주체다. 변화, 그것이 바로 성령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또한 성령을 통해 역사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수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우리 안에 거하는 새로운 생명에 의지하고 교류를 갖는 것뿐이다. 어떻게? 믿음으로써!

 

 

2부 내면을 들여다보라 - 신자들 안에서 행해지는 성령의 역사

6. 믿음

성령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데 있어 우리는 먼저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런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소유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 이 진리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 자리잡게 될 때 우리는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의를 이루려는 것은 마치 포도밭에서 사과를 재배하려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죄 많은 우리의 육체는 애초부터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우리의 육체는 오히려 사악한 일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게다가 아주 놀라우리만큼 멋지게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스스로 성령의 열매를 만들어 내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의 육신을 개선해 보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 : 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 : 67)."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 : 20)."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하리란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전부이다. 성령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다윗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믿음을 따랐다. 골리앗과 싸우러 계곡으로 내려가기 전에 주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 : 37)."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도록 할 준비를 항상 하고 계신다. 성령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뿐이다. 우리가 기꺼이 성령님, 저는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혼자서 감당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게 응답하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소서. 저는 당신만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성령에게 청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해야 할 부분만을 감당하고 그 나머지는 성령이 채워 주시리라 믿는 것뿐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아름다운 삶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앞으로 몇 시간 안에 우리는 어떤 거인을 직면하게 될 것 같은가? 어떤 감정과 싸워야 하는가? 어떤 유혹을 직면하게 될 것 같은가? 바로 지금 승리를 외쳐 보라. 우리의 믿음을 발휘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7. 한발 한발 보조를 맞추어

처음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나타낸 것은 성령의 성품이 아니라 표적이었다. 그런 표적으로 인해 그 도시에 살던 불신자들도 무언가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령이 다락방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만 임하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다른 신자들도 성령을 영접하게 되었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한 순간에 성령을 영접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놓고 성령이 마치 파도처럼 기독교 사회를 천천히 휩쓸었다고 말한다. 오순절, 그 당시에는 성령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이 끝난 후 얼마 안되어 결국 성령은 모든 신자들 위에 임하사 당신의 거처를 정하셨다.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근거를 가지고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사도행전 19장 이후에서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 외에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하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거나 하는 일에 대한 기록이 없다. 192절에서 바울이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전혀 없는 신자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들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바울는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분명 예외적인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으로 믿음을 갖게 되어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요한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다녔다! 이런 그들이 자신들이 없는 데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얘기를 듣고 놀랐으리란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은 지 채 몇 년도 안되어 성령은 온 세계를 두루 살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충만하게 채우셨던 것이다.

 

둘째,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거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 : 13)." 바울은 (all)'라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적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 : 13)."

 

구원이 일어날 때 성령 강림도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명확한 지금, 우리는 성령의 강림이라는 주제로부터 신자 안에서 성령이 행하는 역사 쪽으로 초점을 옮겨 가야 할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 : 16)."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5 : 18)."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매 순간마다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때 성령은 신자들이 자신들 각자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나 인도자이며 안내자로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신자들을 거룩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 대해 품고 계신 궁극적인 뜻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우리는 그에게 속하게 되었고 죄악의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이제는 한 번에 두 주인을 모실 수 없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든지 아니면 육체의 욕망을 따르든지, 그 둘 중의 하나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탄도 우리에게 말을 건넬 수 있고 우리 안에 육체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과 달리 고작해야 우리 옆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그의 권리는 깨어졌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성령을 좇아 행할 수 없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데 있어 우리의 생각과 실제적인 능력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있다. 영의 생각을 하면 우리의 마음은 진리로 가득 찰 것이며 항상 진리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악한 행위도 한 번은 머리로, 그리고 또 한 번은 행동을 통해 저질러지기 때문에 사악한 행동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사악한 마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내가 사악한 마음과의 싸움에서 오랫동안 패배를 거듭한 것은 선한 행동에만 거의 모든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을 다해 노력해도 선한 행동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벧전 1 : 1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12 :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대부분의 선물들처럼 상상의 능력도 죄악에 의해 퇴색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아이디어, 개념, 꿈 또는 상상 같은 것들을 진리에 비추어 판단해 보아야 한다. “참된가? 경건한가? 옳은 것인가? 정결한가? 존경받을 만한가? 칭찬받을 만한가? 덕이 있는 것인가?” 이 기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라.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그릇된 생각이 침투할 때마다 성령이 얼마나 빨리 경고 사인을 보내는지, 우리는 그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성령과 사탄 중 누구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느 오후 내 마음속을 파고드는 그릇된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불렀던 바울의 말이 생각났다. 문득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 삼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대적하는 거짓을 폭로하고 파괴한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 때부터 나는 우리가 쉽게 현혹될 수 있는 그릇된 생각에 대응되는 구체적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 구절들로 내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내 육신은 내게 잘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상상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의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이 경우 나는 베드로전서 3 : 9의 말씀을 암송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 : 9)." 또한 내 믿음에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하나님은 선한 자로 하여금 왜 고난을 당하도록 하시는가 하는 고민에 대해서도 성경 말씀이 바른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 : 19)." 성령을 좇아 행하는 최상의 방법은 성경을 암송하고 그 말씀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다. 진리와 친숙해질수록 거짓되며 그릇된 것을 찾아내는 일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악한 생각,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니다. 그 안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죄악인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며 그것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는 진리에 따라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무시한 채 억지로 끌고 가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다 성령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생기면 성령과 우리 중 어느 한 쪽이 물러나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물러나는 쪽은 성령이다. 전지 전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우리를 억지로 몰고 가는 법이 없다. 성령은 가만히 옆으로 물러나 우리가 다시 그를 믿고 따르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

 

8.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의 모습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을 띠며 어떻게 행하는가?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아홉 가지 특징적인 덕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인내), 자비(친절함), 양선, 충성(성실함), 온유, 절제. 성령의 이러한 열매는 단순히 많은 특징들 중 하나가 아니라 성령 충만의 명확한 특징이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은 우리가 성령께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그의 가르침에 민감하게 응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마이애미에서 연단을 겪고 난 후 나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위축됨 없이 여유롭고 온유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나를 실족케 했던 유혹들도 절제를 통해 물리칠 수 있게 되었으며,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은 데서 오는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 모든 일이 변해야겠다는 나의 결심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전보다 더 친절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성령의 열매를 대신하는 기준으로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첫째가 성령의 은사요 둘째가 타고난 재능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나름의 중요한 역할은 있지만 성령 충만한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기준이나 도구라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컹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7 : 1517)."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발견할 수 없다면 속히 그들 곁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성령의 열매가 재능이나 능력 같은 것들과 다른 점은 환경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만사가 순탄할 때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는 쉽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주위 환경이 악화되었을 때 눈에 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삶은 사랑, 기쁨, 평안 그리고 인내 등의 성격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분은 정반대의 특징을 보이는 세상에서 그런 삶을 사셨다. 그는 우유부단한 겁쟁이가 아니었다. 때가 이르자 그는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맞서 대항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언제 침묵을 지켜야 할지도 알고 계셨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토론을 벌일 때 그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권위를 가지고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셨다.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그리스도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죄인들조차도 그와 함께하기를 좋아했다. 그리스도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분이셨다. 그는 우쭐대는 법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으름장을 놓는 법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할 때가 다가오자 그리스도는 가장 어려운 문제인 죽음의 문제와 싸움을 벌이셨고 결국 승리하셨다. 그런 놀라운 삶을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보내 그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셨다. 주님의 목적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 : 27)."

 

성령 충만한 사람들, 그들은 주변 상황과는 동떨어진 어느 곳에 격리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주변의 다른 모든 이들처럼 실수도 하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도 하며, 실망하기도 한다. 매일 유혹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한 이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변 상황의 변화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와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위 환경이 평안을 무너뜨릴 때면, 그들도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해 주저앉아 있는 법이 없다. 도망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의 생각을 한다. 바로 그 영의 생각이 자신들에게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 주리란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복수의 생각으로 얼마 동안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바른 시각을 회복하고 다시 진리를 바라본다. 그들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8 : 28)."는 말씀과 신자로서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들은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의 길을 택하며, 실족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한다.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화해이기 때문이다.

 

9. 창조주의 권능

성령은 신자들을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당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 성령은 여러 가지 방식을 택하는데 그것이 어떤 방식이 되었든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목적은 그 한 가지뿐이다. 성령은 그 한 가지 일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보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우리의 삶을 통해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체험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을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믿음으로도 못하고, 기도로도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권능을 이용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대신 그가 우리를 이용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령의 권능은 두 가지 채널을 통해 신자들의 삶 속에 나타난다. 하나는 성령의 은사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 관계가 종종 간과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성령의 권능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많은 혼란을 들 수 있다. ‘권능또는 이란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쉽게 소경이 눈을 뜨게 된 일, 예수님의 부활, 재림 등을 연상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놀라운 사건이나 기적 같은 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이 인간들 위에 임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 신자들을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통해 나타나는 권능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드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권능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이끈다. 둘째, 하나님의 권능은 신자들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할 수 있도록 그들 사이에 유대 관계를 형성해 준다. 셋째, 하나님의 권능은 죄악으로 인한 파멸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한다.

 

성령은 우리를 유능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들고 싶어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권능을 나타냄으로써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하신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가 준비되어야 한다. 첫째,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한다. 일단 이 두 가지가 준비되었다면, 이제 할 일은 주의를 기울여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전에는 두려워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10. 은사를 베푸는 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내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사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 정해진다. 성령의 은사는 특별한 능력을 의미한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신자는 그 받은 은사에 합당한 일을 담당할 때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성령의 은사나 천부적 재능은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를 신자들에게 고르게 나누어 주신 뒤 그들간에 네트웍을 구성해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저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내에서 한 지체로서 담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 : 411)."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진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성령의 은사는 성령을 나타낸다. 둘째,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심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셋째, 성령은 그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일을 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가를 보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를 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없어서는 안될 일원이다. 여러 부서들을 돌아다니며 열심을 다해 우리에게 맞는 일을 찾으라.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 또한 성령 충만하여 아름다운 삶의 한 모습이다.

 

11.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

하나님의 종 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하나님의 방법을 택하고 있지 않은 이들이 많다. 결국 실패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4 : 6)."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교회에 참여해 봉사하는 일만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의 전부는 아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3 : 2324)." 하나님은 세상적인 일과 종교적인 일을 구분짓지 않으셨다. 유감스럽게도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우리의 삶 속에서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한 주무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의 자리에 세워 놓으신 데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접근 방식을 보인다. 첫 번째 방식은 인간적인 또는 육신적인 방식이라 하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을 뿐이고 그 일을 해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내리시지 않는다. 육의 생각을 좇아 행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두 번째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해질 때 그 곳에서는 명백한 성령의 표적이 나타난다. 인간의 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뿐이다. 육신의 생각을 좇아 행해진 일은 우리의 감정 그 이상의 더 깊은 부분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런 일은 겉보기에는 매우 인상적이나 그것으로 인해 변화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감정을 휘저어 놓을 수는 있어도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종종 하나님의 방식으로 오인되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도인데, 단순히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육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내용의 기도를 나는 많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도움 없이 혼자서 죽도록 일하고 난 뒤 두 손을 들고는 포기했어요. 하나님께서 내 대신 이 일을 감당하소서.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자포자기이다. 마지막으로 내버려둬.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거야.”라는 식의 접근 방식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일까? 나는 성경을 연구하던 중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의 특징 다섯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둘째,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시는 유일한 공급원이다. 셋째, 그들은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찾는다. 넷째, 그들은 스트레스로 쓰러지는 일이 없다. 다섯째, 그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보다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칭송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약속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큼 그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궁극적 표현이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보일 때 나는 일종의 흥분을 느끼고 내 어깨 위를 짓누르던 중압감도 사라진다. 주위의 사람들을 이용하기보다는 그들을 마음껏 사랑하게 되고, 내 기도는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차게 된다. 또한 전보다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내가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걱정도 없다. 이러한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힘을 의지해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12. 성령 세례

나는 성령 세례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기 위해 성경을 뒤져보다가 두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첫째로, 성경은 성령 세례에 대해 분명하고도 일관된 설명을 하고 있어 혼란이 야기될 이유가 전혀 없다. 둘째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성령 세례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확신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회심과 성령 세례간의 시간적 간격이 혼란의 주원인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시간적 간격이 있는 것이 정상적인 형태라고 믿기에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 힘쓰도록 신자들을 고무시킨다. 사도들도 나중에야 성령 세례를 받았고, 바울도 그랬으며,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랬다. 그 당시로서는 그런 시간적 간격이 필요했다. 그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까지는 성령이 강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순서대로 사건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이전에 구원을 받은 이들의 성령 세례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은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받지 못했습니까?”라는 질문이 이분법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내에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할 중 하나는 신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교회 내에서 화합과 단결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은 이들과 받지 못한 이들로 구분되어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줄 만한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이런 식의 사고는 영적 은사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내용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를 가득 채우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여 아름다운 삶을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3부 앞을 보라 - 의사결정에 참여하시는 성령

13.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 : 13)."라는 말씀에 담긴 네 가지 핵심적인 진리를 먼저 살펴보자.

 

첫째, 성령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지 우리를 통제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항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 성령은 신뢰할 수 있는 인도자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므로 신자를 진리로 인도하며, 진리에 따라 인도한다. 성령은 신자들이 진실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최선의 것과 단지 괜찮은 것을 구분하도록 도와준다.

 

셋째, 성령은 하나님의 대변인이다. 그리스도처럼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한 존재인 성령은 기꺼이 하나님의 권능에 머리를 숙인다.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성령은 자의로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신다(11 : 12)."

 

넷째, 성령은 말씀하신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체험한 것을 놓고 볼 때, 성령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오늘도 신자들과 교통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성령은 기꺼이 우리와 교통하기를 바라시며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나는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지는 못했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는 일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내게는 없었으며, 매일매일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이 일일이 신경을 쓰실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낯익은 성경 구절 하나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벧전 5 : 67)." 갑자기 이 말씀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염려를 당신께 맡기라고 하셨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 : 31-32)." 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가장 하찮은 부분까지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업, , 자녀들, 휴가, 우리의 교회, 우리의 재정 상태, 심지어 우리의 취미에까지 신경을 쓰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큼 중요한 존재들이다.

 

14. 중립의 원칙

변화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항상 너무 빠른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잘못된 것이 없으면 고칠 이유도 없다.”는 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다. 변화란 결정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내린 결정은 수백 세대에 영향을 끼친다. 지난 2년에 걸쳐 우리 교회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는 가운데 성령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계심을 나는 여러 번 깨달을 수 있었다. 큰 결정뿐만 아니라 조그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도 성령은 우리와 함께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내용보다 우리가 당신께 기꺼이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완벽하게 조화될 수 있는 심령과 마음을 소유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바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립적인 심령이란 자신의 상처와 임무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심령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찾고자 자신의 이해 관계는 뒷전으로 미루고 항상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나가는 심령이다. 성령은 훌륭한 전달자이다. 그러나 그가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응답을 듣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중립적인 자세를 갖게 될 때까지, 결국은 순종하게 될 때까지 그분은 기다리신다.

 

15. 표적 1: 평안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신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몇 가지 표적을 보이신다. 첫 번째는 평안의 표적이다. 성령이 함께하심을 첫 번째로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이 평안의 열매(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이다. 내적 평안이 어떤 것인지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의 유, 무는 쉽게 알 수 있다. 기쁨처럼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며 분명 환경도 초월하는 것이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실제로 모든 것이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평안이다. 우리의 내면이 차분하게 정화된 상태, 그것이 평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빌립보서 4 : 67을 좋아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옳지 않은 영향력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파고들 때 우리는 불길한 예감이 들고 주저하게 된다. 항상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만은 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상식적인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말해 평안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때때로 납득이 안될 때가 있다. 평안은 인간의 이해를 거부한다.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평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을 때 그에 대한 확신을 줌으로써 우리가 안심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환난으로부터 보호하기를 원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무시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우리가 실수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결코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평안이 있는지를 순간순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음성을 더 많이 듣고 그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음 자세를 더욱 확고히 하면 할수록 우리는 성령과 더욱 친숙해질 수 있다.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하는 다른 음성들로부터 성령의 음성을 구분하는 일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 진정으로 성령을 찾기 시작할 때, 성령이 주시는 평안의 유무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성령이 항상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에 몹시 감격하게 될 것이다. 성령이 기꺼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사랑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 아주 조그만 부분까지 미치는 그런 사랑이다.

 

16. 표적 2: 양심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 : 1415)."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의 도덕적 강령을 새겨 놓으셨다. 그것은 때로 내면으로부터 주저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는 단지 평범한 죄 의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선한 일을 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우리 내면의 무언가가 그것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데 그 무언가가 바로 양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양심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주님을 영접했을 때 원래부터 갖고 태어난 우리의 근본적인 도덕 강령은 새롭게 거듭나게 되고, 진리의 영이 여러분의 심령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이다. 성령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양심을 재프로그램하는 일을 완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반면에 우리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일반적인 지각력을 갖기에 앞서 더욱 구체적이며 완전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갱신하는 작업도 시작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성경 구절을 암기할 때마다, 또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 갱신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양심은 성령이 사용하는 주된 도구 가운데 하나로서 성령은 그것을 통해 신자들과 교통하신다. 특별히 세 가지를 들자면, 첫째, 즉각적인 경고 장치로 양심을 사용하신다. 둘째, 정확한 평가자이며 판단자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성령은 양심에 힘을 불어넣는다. 셋째, 판사나 배심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성령은 양심에 힘을 불어넣는다. 양심의 경고와 가르침을 무시하지 말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17. 표적 3: 하나님의 말씀

성령이 당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세 번째 도구는 성경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에게 보내신 전령인 성령이 신약과 구약에 담겨 있는 영원 불변의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울 것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첫째로, 어떤 것에 대한 성령의 생각을 알고 싶다면 성경을 읽으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조금의 이해도 없이 하나님의 평안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둘째로,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이 금한 곳으로 인도하는 일이 결코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과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끝없이 애쓰고 계신다. 신자들의 마음과 심령을 열어 우리로 하여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하도록 한다. 어떤 성경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와 놀라운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친 적이 있는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 속에서 성경을 펼친 순간 여러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딱 들어맞는 구절을 발견해 본 경험이 있는가? 이런 일은 결코 우연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밝히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셨으며, 그 당시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를 우리 심령에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성령이 행하는 이러한 현현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다. 매일 조금씩 읽어 나가라. 그래야만 성령이 아무 제약 없이 여러분의 생각과 심령에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18. 표적 4: 지혜

성령의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네 번째 표적은 지혜다. 성령은 현명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해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현명하게 살기를 거부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 : 1518)."

 

지혜는 원칙과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 있는 틈새를 메꾸어 준다. 이 세 가지 모두를 고려하고 난 뒤 하나님,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이다. 지혜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을 우리 개개인의 독특한 상황에 딱 들어맞도록 하기 위해 성령이 종종 사용하는 도구이다. 내 경우에 현명한 것이 여러분에게는 현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성령은 지혜를 사용해 우리를 곤경으로부터 건져 주신다.

 

우리는 세 가지 측면에서 예리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첫째,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인가? 둘째,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인가? 셋째, 장래 계획과 꿈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인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 우리에게는 맹인처럼 살아갈 여유가 없다. 즉 다가오는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이하며 살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멀리 내다보고 앞에 닥쳐올 고난에 대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악한 것을 피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자기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갈등을 일으킬 때면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다. 우리는 시간만 충분하다면 어떤 것이라고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그런 행동은 성령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재난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우리의 심령이 어떤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할 때 우리는 지체없이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길게 끌면 끌수록 우리의 변명은 길어지게 되며, 변명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에게 다가올 위험은 커지는 것이다.

 

성령의 경고는 선과 악이 구분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 어려움이 있는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적어도 아직까지는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부터 성령의 경고는 시작된다. 우리를 사랑하는 성령은 우리가 벼랑 끝에 다다르기 전에 경고하신다. 때로는 내가 벼랑에 대한 생각을 하자마자 성령의 경고가 시작되는 것 같기도 하다! 성령의 책망을 회피하지 말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는 마음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아슬아슬한 장난을 즐기지 말라. 그러면 고통과 죄악, 후회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죄악으로 인해 인간 관계가 깨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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